오랫동안 편안함의 둥지를 틀고 살던 서울 명동에서 강원도 원주로 내려온 지 한 달이 되었다.
22년 전의 첫 소임지!- 수도생활에서의 첫 소임지와 삶은 순수와 열정의 세월에 묻어두고 가끔씩 꺼내 보는 첫사랑과 같다고 할까.
원주는 애송이 수녀시절- 거침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다가 떠난 곳이어서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그리움으로 남아 언제나 고향처럼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을 실어다 주었다.
버스에 몸을 맡기고 새로운 씨앗 하나 가슴에 품고 원주로 내려오는 마음은 어찌나 설레이던지…!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들킬까봐 쿵쿵 거리는 가슴을 꼬옥 보듬으며 치악산의 신선한 정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귀에 익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듯하여 나는 깜짝 놀랐다. 지학순 주교님!
생전의 어느 날, 5층 집무실에서 찌그러진 리어카에 채소를 싣고 쉰 목소리로 “채소 사려” 외치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를 발견하시곤 “이름 밝히지 말고 성능 좋은 메가폰 하나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주라”고 하시던 주교님 !
김지석 주교님께 귀향(?)의 인사를 올리러 주교관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문득 (살아)생전 그분의 큰 음성과 섬세함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 때문일까? 아님 다시 첫사랑을 하게 될 기회를 부여받아서일까 ?
새 소임지에서의 일들이 나를 주님의 물가로 이끌며 내가 주님의 기쁨이며 향기이기를 재촉한다.
오늘은 잠시,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가슴에 품은 씨앗 하나 꺼내어 따뜻한 햇살에 누여 놓으며 아직 치악산을 서성대고 있는 겨울아이와 솔향기 가득 바구니에 담아 종종 걸음 하는 봄아이를 초대한다.
최안젤라 수녀(쎈뽈 디자인 연구실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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