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 있는 ‘산위의 마을’은 충북 단양 읍내에서 영월쪽으로 20분 정도 가야하는데 줄곧 남한강변을 따라 가게 된다.
그 주변으로 펼쳐지는 협곡의 산과 강, 억새 강변, 국도변의 가로수, 그리고 어머니의 정갈한 가르마 같은 산촌의 밭두렁 등 계절마다 뚜렷한 색감으로 변신하는 경치는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얼마 전 면사무소에서 일을 보고 나오다 마당에 잠시 서서 눈을 드니 그날따라 바로 앞에 펼쳐진 기암괴석의 절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느껴졌다.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아래로 흐르는 남한강은 온 백두대간 산하의 얽힌 전설과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역사를 가슴에 묻어두듯이 묵묵히 흘러간다.
멀리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아오라지를 거쳐 오던 강이 오대산에서 출발한 물을 만나 동강을 이루며 정선과 영월을 지난다. 곧 평창강 주천강 합수가 서강인데 동강 서강이 하나되어 남한강이 시작되는 것이다.
단양팔경의 제1경인 도담삼봉을 쓰다듬으며 흐르던 남한강은 충주를 지나 섬강을 껴안고 여주 양평을 거쳐 팔당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교합하니 두 물이 만났다고 해서 두물머리(양수리)이고 여기서부터 서울의 젖줄 한강으로 불린다.
한강이 황해의 품으로 귀의하기까지 불리는 이름은 여럿이지만 하나인 물이기에 그 모든 여정과 역사를 안고 있는 강심은 경건하다. 금강산 골짜기로부터 먼먼 여정의 지리와 궤적을 안고 흘러온 북한강과 낙동강 칠백리는 말할 것 없고 금강 섬진강 영산강 임진강 예성강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사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답답하더니 가슴마저 웅크려지기가 예사다. 불순한 일기 탓만이 아니다.
‘한반도 대운하’란 괴기스런 흉계 때문이다. 기쁨과 희망의 춤을 추며 흐르는 남한강이 서해가 아니라 뜬금없이 남해로 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대운하! 어머니의 젖가슴을 폭약과 굴삭기로 찍어 내리면서 화려한 폭죽쇼의 기공식 버튼을 누르며 성공시대를 건배하는 이들의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저지르려는 정치인들을 우리 손으로 뽑은 죄책감 때문이며 그 당당한 민주주의가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 했거니와, 그래서 산은 강을 넘지 않고 강은 산맥을 가르지 않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창조의 질서 그것이다. 그 질서 안에 세계 인류의 문명과 문화와 역사가 점철되었고 명멸했다.
그래서 성현들은 한결같이 대자연의 법을 경외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쳤다. 인간의 오만이 자연의 법을 넘어서려 할 때는 어김없는 재앙으로 응징되었음을 창세기 에덴동산과 바벨탑의 이야기로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며 걸어 다니는 대지의 솜털일 뿐이다.
장자는 “숲에 사는 새는 온 숲이 제 세상인양 노닐지만 정작 그에게는 둥지 틀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했는데 왜 우리는 모든 환경이 인간의 의지 앞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남한강은 태백에서부터 정선 아리랑을 부르며 서울 마포나루까지 운반하던 아오라지 배꾼들이 뗏목을 타고 지나가던 길이었지만 그것은 100년 전 이야기다. 충주댐 건설 초기만 해도 충주호 유람선이 단양까지 왔다. 그러나 20년도 못되어 단양 선착장은 폐쇄되고 말았다. 강수량이 줄어든 탓이다. 20년 후에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필자는 솔직히 물류가 어떻고 경제성장과 국민소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생각만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대운하 못 만들면 국가 경제가 붕괴되고 성장이 뒷걸음치고 토목 건설업이 모두 도산하고 대운하 예정지 주변 농민들이 파산한다’고 한다면 고집 피울 생각도 없다.
하지만 대운하 없어도 아무 탈 없을 것을 두고 고집 피우는 것은, 가정에서도 동네서도 국가에서도 안 될 일이다. 여러 사람 괴롭히고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음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식품일 뿐이고 바벨탑은 건축 공학의 문제일 뿐이니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결심만 하면 가능할지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일도 있다.
대통령은 5년으로 물러날 것이지만 그가 환각에 취해 긁어버린 상처는 500년 재앙이 되어 후손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지도 모른다. 경제가 죽어서 살리겠다고 하면서 국민의 에너지를 대운하 반대에 낭비하게 한다면 그것도 안 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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