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5천원’.
지난 2000년 10월 9일 선종한 전 안동교구장 박석희 주교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한 신문 기사의 첫 대목이다. 내용인즉,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사제들이 확인한 유품은 등산길에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 든 지폐 몇장이 전부였고, 이 사실이 장례식에 참석한 신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는 예기다.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른 연유는?
사연은 이렇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온 딸 아이와 오랜만에 TV 앞에 앉았다. 도란 도란 얘기하던 딸 아이가 “제2 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했다”며 불쑥 내뱉는다.
순간, 뇌리를 스친다. “어 이건 아닌데...”
“왜 아빠랑 상의도 없이 결정하니?”
아이의 표정이 일순간 굳는다. “제가 좋아서 선택한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 엄마도 “왜 그런걸 혼자서 결정하느냐”며 대뜸 아빠편을 들고 나선다.
아이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떨군다. 아빠의 공격은 계속 된다.
아빠도 불어를 제2 외국어로 배워 조금은 안다는 둥, 불어는 갈수록 어렵다는 둥 온갖 하찮은 예를 들어가며 아이의 선택을 공격한다.
아빠의 마지막 강변은 이거다.
“이과(理科)로 진로를 정하고 물리나 화학을 전공하려는 애가 왜 불어를 선택하느냐”.
“불어는 인문학에 더 가까운 언어다. 장래에 도움도 안되는데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느냐”는 거다 .
그렇다. ‘전공’(專攻) 운운하며 아빠가 화 난(?) 진짜 이유는 “성공하는데 도움 되지도 않을 일을 왜 선택하느냐”는 거다. 불어가 인문학에 더 가까운 언어라는 도대체 근거도 없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아이의 선택을 비난하며 흥분한 이유는, 바로 세속적인 성공,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였다.
부끄러웠다.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주지 못한 것이 그랬고, 한낱 속물적인 잣대로 아이의 판단과 선택을 송두리째 난도질 한 것이 가슴아팠다.
우리는 자주 있지도 않은 허상을 좇으며 삶을 팍팍하게 살아간다.
‘신앙은 역설’이라면서,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이 우리가 희망하는 삶이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속내는 어느새 세상을 좇는다.
더 큰 집 갖길 원하고, 더 크고 좋은 차 타기를 원한다.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좋은 배필 만나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열심히 기도한다.
그것 자체가 나쁠 건 없다.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멸시받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더 벌고 더 많이 가지려면 덜 양심적이어야 하고 더 이기적이어야 함을 경험이 알려주기에 가난이 불편할뿐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엔 늘 괴리가 존재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삶을 살기란 그래서 참 쉽지 않다.
‘존재에 충실함’. 어떤 모습으로 있어주기를 바라기 보다, ‘있음’ 그 자체로 충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겠다. ‘있음’은 그것을 가능케 한 하느님께로부터 왔기에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한데, 내가 온갖 껍데기를 씌우려 한다.
‘존재’(Esse)에 근거해서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정진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내가 가장 속물적인 근성을 드러낼때 은사 주교님의 가르침을 떠올린건, 아마도 책상머리에서 늘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시는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인듯 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