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타계한 뒤 마지막으로 남긴 산문이 소개됐는데 가슴에 쑤욱 와 닿았다.
“나는 평소에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존을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살아 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한동안 고민해 온 문제의 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박씨는 생명사상가로도 일가를 이뤘다는 평이었다. 노년에 들어선 강연과 대담, 글쓰기를 통해 생명의 평등과 생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요즘 지구촌은 어떤 모습인가.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지난달 중순 독일 본에서 열린 유엔생물다양성회의에 지구의 건강 척도인 생물다양성이 지난 35년간 3분의 1 가까이 줄어들었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197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육상 생물은 25%, 해양생물은 28%, 담수 생물은 29%가 멸종했다고 전했다. 유엔환경계획(UNEP)도 최대 5000만 종으로 추산되는 지구상 생물 가운데 해마다 1만 8000∼5만 5000종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 인류 탓이다. 유엔생물다양성회의를 주최한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환경장관은 “순전히 인류 활동의 영향으로 1000배, 심지어 1만 배의 속도로 멸종이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올 2월엔 ‘글로벌 농작물 다양성 트러스트(GCDT)’가 노르웨이와 빌 게이츠 재단,유엔재단의 후원을 받아, 북극점에서 1000㎞ 떨어진 노르웨이 북쪽 스발바르섬의 눈 덮인 산 속 영구동토층에 450만 점의 종자 샘플을 보관할 수 있는 식물저장고를 지었다.
지하갱도 130m 깊이에 위치한 저장고는 보존온도가 영하 섭씨 18도로 기상재해나 핵전쟁에도 종자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우리 농촌진흥청도 국내 작물 1만 3000여 점의 종자를 보낼 예정이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이제 건전한 상식과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우리의 삶의 터전을 잃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경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인간의 탐욕과 자본주의의 광풍으로부터 지구촌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아울러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 지 자문하게 된다. 박경리씨의 생명 사상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과 맥이 닿아있다. 박씨는 2006년 현대문학에 기고한 글에서 “창조주는 바람과 물과 불,그리고 땅이라는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자유를 부여한 생명을 세상에 풀어놓았습니다”라며 생명과 창조주를 예찬했다.
가톨릭 교리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 이외의 피조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하느님〉사람〉사람 이외의 피조물 순이다. 그것이 가톨릭의 근본 가르침이고 모든 질서의 바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엔 그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사람을 포함해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르침은 지당하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영위할 때 비로소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 이외의 피조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옳은 것인가. 사람〉사람 이외의 피조물이 맞는 것인가. 모든 생명은 평등한 것이 아닐까.
하느님은 인간에게 삼라만상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다스리도록 맡기셨다. 삼라만상이 서로 어우러져 공존하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다. 2006년 법정 스님이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잠언집을 펴냈는데 하느님이 소망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일 것이다.
생물다양성이 파괴되면 인류에게 재앙이 닥친다. 최근 부쩍 늘어난 기상재해, 자연의 역습이 전조다. 환경. 생태전문가들은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않아 지금처럼 온난화가 지속되면 지구적 차원의 멸종이 시작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창세기에서처럼 노아의 방주에 피신한 생물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생물다양성의 파괴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이제 지구촌은 저 혼자만, 제 나라만, 인간들만 잘 살게 해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문학에 목숨을 바치다시피한 박경리씨는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살아가는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며 생명을 문학 위에 두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 생명의 평등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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