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의 마을’에서는 매달 7박8일 간의 ‘단기입촌’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매번 참가하는 분들은 다양하다. 대부분 신심, 봉사활동에 아주 열심한 교우들이다.
그러나 상당기간 쉬고 있는 분들도 온다. 매번 한두 분씩은 개신교나 비신자도 있다. 젖먹이 유아를 데리고 참가하는 젊은 가족도 있고, 금방 퇴직한 중년의 부부도 있고 미혼, 기혼 독신자들도 있다.
다양하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도 있다. 오늘날 자신 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의 양상이 정말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연한 고민이 아니라 삶의 대안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산촌 오지마을까지 찾아오는 표정에는 약간의 비장함도 느껴진다.
표정이 비장하다는 것은 세상에 사는 이유가 비정(非情)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녀들은 어린 나이부터 입시 경쟁의 검투사가 되어야 하고 부모는 사교육비 조달의 현금지급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몸을 바친다.
응용 과학기술은 단순한 자동화뿐만 아니라 농산물, 축산사료 생산까지 담당하면서 620여 가지의 식품 화학 첨가제로 변형 식품을 식탁에 올려 환경호르몬(내분비 교란 물질)을 가동시킨다.
그래서 청년 불임은 늘고 태어난 아이들은 아토피와 조기생리, ADHD(집중력결핍과잉행동장애 증후군)로 고통 받는다.
소비사회의 마케팅은 가계지출을 한없이 늘어나게 하여 밑 빠진 독으로 만든다. 사회 전체가 모두 ‘경제 발전’을 절대가치로 삼아 산을 깎아 골프장을 만들고 강을 파서 운하를 만들고 산천 갯벌을 학대하고 난자하며 굴종의 외교로 자존심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우리 시대는 발전의 깃발만 남고 사람은 없는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고속열차다.
여기서 한 가지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 교회도 고속열차 속에 있을진대, 함께 경치를 구경하는 승객인가? 아니면 고속의 질주를 멈추도록 외치고 있는 미친 예언자일까?
좋은 경치 구경에 정신이 팔린 승객들과는 달리 영적 감각을 가진 이들은 우리 시대의 고속열차가 브레이크 파열 상태로 질주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탈출을 모색하며 대안의 삶을 모색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비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갈증의 위기감에서 샘을 찾아 헤매는 목마른 사슴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읽는다.
산위의 마을에 자녀들까지 데리고 입촌한 가정들에 대해서 “현실 패배의 도피 성격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반문했다. “우리는 그렇지만 당신의 현실 승리란 어떤 삶인가?”
대안사회의 삶인 공동체주의, 공동 소유, 생태주의, 유기농업, 공동체 세계관의 교육을 모색하는 공동체는 종말론적 구원의 삶이다.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의 외침이다. 모두 공동체로 살자는 것도 아니고 신자라면 모두 무소유의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믿는 이들의 삶이 하느님의 창조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비교될 수 있는 실재하는 현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하게 살았는데도 창조질서와 인간성 파괴에 참여한 것이 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공동체는 그 오류를 비켜가도록 비춰주는 비교 원형으로 그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응답의 삶이다.
그럼으로 해서 공동체는 시대의 등대가 된다. 민주화를 추구했으되 목적 세계가 부족했을 때 결국 어떤 민주주의가 되고 마는지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다. 성취만 강조하고 과정이 없는 발전도 어떤 결과가 되는지 경제 노동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다. 운동은 목적성 분명한 플랜과 프로그램을 필요로 한다.
삶에는 한걸음 앞선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세 걸음 앞선 삶도 있다. 정치인이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한걸음 앞선 삶이다. 건강을 위해서 유기농업이 필요하고 생태 환경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두 걸음 앞선 삶이다. 두 걸음까지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따르기도 한다.
그런데 세 걸음에는 공감이 어려운 점을 갖는다. 가령 독신의 구도자 삶 같은 것이다. 인정은 하되 따라가지는 않는 삶이다. 공동체는 세 걸음 앞선 삶이다. 그래서 이해하는 사람도 적고 찾는 사람은 더더욱 적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항상 세 걸음 앞서 가는 사람을 두 걸음이 따르고 결국 모든 사람들은 그 길을 일반화시킨다.
그래서 공동체는 광란의 시대를 방주로 인도하는 등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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