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 내가 자라던 고향집 뒷산에는 대나무가 있었다. 아니 대나무 숲이 있었다.
대낮에도 들어서기 무서울 만큼 어둡게 우거져 있었다. 봄이면 죽순이 저마다 뽀족한 창끝처럼 솟아나 발 들여 놓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매서운 겨울이 지나자, 그 시퍼렇던 대나무 잎새들이 시들시들 마르기 시작했다. 온 산야가 파랗게 변한 여름이 되자, 급기야 뒷산 대나무숲만 홀로 누렇게 낙엽이 들어 말라 죽어버렸다. 대숲 전체가 송두리째 말라 죽은 것이다.
그때 어른 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대나무는 죽을 때가 되면 다같이 한꺼번에 죽어버린다고… 그런데 왜 그런 것일까? 그 때는 참 궁금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자 뒷산은 다시 대나무숲으로 변했다. 한두 그루 살아남았던 것인지,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겨울에도 늘 푸른 대숲이 보고파서 우리 집 앞뜰에도 고향 집 뒷산의 대나무 한 뿌리를 잘라다가 심었다. 몇 년이 지나자 여러 그루로 번식을 했다.
그런데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았다. 예로부터 대나무는 집 뒤에 심어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앞뜰의 대나무를 캐내서 옮기기로 했다.
몇 그루 되지 않으니 쉽게 캐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땅을 파보니 땅 위에 솟아난 것보다는 땅 속에서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는 대나무 줄기들이 훨씬 더 많았다. 가히 숲을 이룰 지경이었다. 뿌리 한쪽을 찾아 걷어내니 한꺼번에 몽땅 뽑아낼 수 있었다. 땅 위에 솟아난 여러 그루의 대나무들이 땅 속에서는 단 하나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땅 위의 대나무 숲은 결국 한 그루의 대나무였던 것이다. 문득 어릴 때 의문이 풀렸다. 어떤 이유에서건 땅 속의 한 그루 대나무 뿌리가 죽으면, 땅 위의 수많은 대나무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히 땅 위로 드러난 대나무는 그야말로 나 홀로 대쪽이요, 다른 어떤 무리와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이 올곧다. 그런데 그 대쪽들이 단 하나의 뿌리에 어우러져 살아간다니. 오히려 수많은 대나무의 올곧음은 단 하나의 뿌리를 기초로 피어나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도 어쩌면 이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서로 떨어져서 이리저리 제 가고 싶은 데로만 가고, 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제 살고 싶은 데로만 살고자 한다. 겉으로는 각기 희망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주장도 다르니, 도저히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방식으로 엮어내기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희망만이 제대로 된 희망이고 다른 것은 망상인가? 나의 생각만이 바른 생각이고 다른 것은 틀려먹었는가? 나의 주장만이 관철되어야 하고 다른 것은 훼방꾼일 뿐인가?
언제부터인가 아이들과 함께 뉴스보기가 겁난다.
흑백논리로 가득찬 뉴스를 보고 어느 편이 옳으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뉴스에 나오는 분들이 모두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존경받아야 하고 희망이 되어야 할 분들인지라 쉽사리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차라리 뉴스를 19세 이하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겉보기에는 수많은 대쪽들도 뿌리에서는 하나이듯이, 단순히 서로에게 다르게 이해되는 사람들도 그 이상의 세계에서는 하나일 것이다.
하나의 뿌리를 기초로 수많은 대나무들이 그야말로 대쪽으로 솟아나듯이, 사람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들도 하나의 뿌리를 자각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생각과 주장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과연 서로 다른 수많은 주장들의 진정한 뿌리가 될 수 있는가? 사람들을 단순한 사람 그 이상이도록 하는 하나의 뿌리란 무엇인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은 무엇인가?
어느 성인은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는 힘, 그것은 사랑이라고.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