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마 시민이오(Civis Romanus sum)!”
2000년 전 서양에서 이 말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전체라고도 할 수 있는 온 지중해를 석권하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가할 때였으니….
로마 최고 통치자들은 국정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밝힐 때면 으레 서두를 이 어구로 시작했다. 원로원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도 철두철미하게 ‘나는 로마 시민을 (위해)…’란 말을 바탕에 깔고 행해졌다. 줄리어스 시저가 그리스 팔사루스에서 정적 폼페이우스를 격파할 때나(BC 48), 이집트를 정복하고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추대해 로마의 보호국으로 만들 때(BC 45)도 그랬다.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의 영광과 평화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그 염원이 얼마나 컸던지 그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서구인들에게까지도 ‘팍스 로마나’는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경 속에서도 이 말이 지닌 위력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방인의 사도 성 바오로의 전도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로마 시민이 지닌 권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바오로 사도를 신문하려던 천인대장이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그를 결박한 일로 두려워하는 모습(사도 22, 29 참조)이나 바오로 사도를 감옥에 가뒀던 행정관이 그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슬그머니 풀어주려는 장면(사도 16, 37~39), 순교에 앞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일(사도 25, 11) 등이 로마 시민권자가 지닌 힘과 권위를 잘 보여준다.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로마 시민권 덕에 박해자들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오로 사도도 이 말 앞에서는 수그러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오”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천주교 신자요”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도로서 바오로 성인이 지닌 정체성의 정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 나라의 시민(필리 3, 20)이라는 점에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이 하느님 나라에 있음을 고백함으로써 전교 여정에서조차 스스로 세상의 시민권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대체 이 말이 지닌 함의가 어떻건대 오늘날에도 이 한마디 앞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가. 멀지 않은 우리 교회사를 통해서도 이 말에는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정체성이 녹아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이자 2000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현재가 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 즉 하느님 나라 시민권자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나는 그리스도인이오’하고 부르짖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참 그리스도인을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그들을 꿰뚫어 보면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로 그들의 행실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한낱 보잘 것 없는 이들로 치부하고 그들에게 다가서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그 어떤 복락을 누리며 살더라도 언젠가는 한데 모아져 태워질 ‘가라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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