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만에 친구의 묘를 찾았습니다. 하관예절 후 국화 한송이를 떨구며 “잘가라 친구야”라고 되뇌었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차가운 땅속에 누운 친구는 이 무심한 사람더러 무어라 할런지요.
참 무던히도 친구들 속을 태웠던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해 주위를 놀라게 하더니 대학에선 민주화운동한다고 몇 살이나 어린 동급생들 틈에서 시가(市街)를 누비고 다녀 부모님 속을 어지간히 썩혔지요. 그래도 그때가 그 친구와 막걸리 잔을 걸치던 마지막 시절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유난히도 막걸리를 좋아했었습니다. 양은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 막걸리에 차가운 사이다를 한병 섞어 마시던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침회 한 접시 그득하게 담겨나오면 부러울 게 없었지요.
특수교육학을 전공한 그 친구가 종적을 감춘 것은 대학졸업후 2년쯤 지난 뒤였습니다. 창원 어디에선가 특수아동교육 교사로 재직한다는 말만 간간이 들었을뿐 더 이상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을까. 느닷없이 들려온 소식은 친구가 간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뒀다는 것이었지요. 백방으로 만나려 했지만 가족들의 접근도 허락치 않는다는 친구의 병실문은 끝내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이 있던 날, 조문객틈에 10여 명의 낯선 젊은이들이 보였습니다.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동료들이었지요. 고별식 후 관을 붙들고는 “형 먼저 그렇게 가면 안된다”며 울부짖더군요. 장례식 후 친구의 마지막 몇 년의 삶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자취방은 동료교사들의 사랑방이자 합숙소였답니다. 박봉에도 정작 자기는 굶을지언정 동료들 불러 술 파티 열어주고 명절날 고향 갈 돈 없어 손내미는 후배들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답니다. 제발 밥 좀 먹고 술 먹으라는 동료 후배들의 근심어린 눈길을 막걸리 한사발에 노래 한구절로 외면했다더군요. 그러니 몸인들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무슨 한이 그리도 맺혔을까요.
헨리 나웬 신부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문득 친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심리학 교수이자 사제였던 나웬 신부는 앎과 실제 삶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나웬은 지식이 많았기 때문에 하느님에 관해서는 많이 얘기하며 살았으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는 부족했음을 시인합니다. 또 기도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쓰고 강의도 많이 했지만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에 대하여는 늘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트라피스트수도원에서 7개월 동안 수도생활을 경험하고 라틴아메리카 빈민가와 우크라이나 선교 등을 체험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와중에 그는 어디엔가 집착하려는 욕구로 살지 않고 삶을 하느님의 선물들에 대한 감사 어린 응답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 바니에가 창설한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 라르슈의 캐나다 지부인 ‘새벽’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습니다. 1985년 하버드대학을 떠나 ‘새벽’에 들어간 그는 199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친구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몇 년은 아마도 나웬 신부처럼 자기 자리를 찾았던 시간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30대 중반 젊디 젊은 나이에,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그 친구는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하염없이 부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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