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수녀원 마당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직접 따먹을 수 있었다. 지난 봄 새순이 언제 돋았나 싶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보이던, 겨우내 볼품없었던 그 앙상했던 포도나무 가지에서였다.
같이 사는 수녀님이 어느 날 가지를 조금씩 치기 시작했다. 조그만 포도알도 송골송골 달렸는데, 갉아 먹힌 잎도 눈에 띄었다.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소개받은 안동교구 농민회 회장님댁에서 설명서와 함께 유기농약과 흰 봉지묶음을 보내주셨다. 친절하게 가지 치는 법부터 약치는 방법, 봉지 싸주는 요령 등을 전화로 설명해주셨다. 가지치기를 하고, 나무 하나에 스무 송이 남짓씩 남겨두고 초록알맹이들을 따냈다. 약을 물에 섞어 분무기로 치고, 흰 봉지로 정성껏 싸주었다. 쌀뜨물 등에 이엠 발효액을 조금 섞어 비료 대신 주곤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추석을 앞두고, 대문 들어설 때마다 단 포도향을 맡을 수 있게 됐다. 제 때 제대로 건사도 못해주었건만 포도나무는 자신에게 붙어있는 가지에 땅의 기운을 전해주고 태양의 열기를 품게 해 단 열매를 맺도록 한 것이다.
맛나게 나누어 먹으면서, 지난해까지 포도나무를 잘 가꾸다가 이사 가신 할머니, 안동교구 농민회 자매님, 바쁜 사도직 중에도 짬을 내 함께 작업에 나섰던 공동체 수녀님들, 해와 비, 땅과 하늘, 이엠 섞인 쌀뜨물 비료, 바람과 지렁이….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말씀 또한 실감나게 다가왔다.
맞다. 우리들은 농부 하느님이 가꾸시는 포도나무 예수님에 속한 가지들이다. 나무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포도나무처럼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족, 이웃, 마을, 나라, 종교, 세상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산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서 성령을 통해 우리 자신의 가지가 다듬어지는 것을 허용해야만 한다.
지난 여름, 가지를 다듬지 않은 포도나무 가지는 쭉쭉 뻗어나가며 탐스러운(?) 잎을 자랑했었다. 하지만 그 가지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열매에 갈 영양이 가지와 잎으로 가서 그런지 그 가지의 포도는 대부분 성글어 먹을 것이 없었다. 나만 쭉쭉 뻗어 승승장구하고 호의호식하겠다는 것이 결국 제대로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게 아님을 포도나무가 알려준 셈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늘과 땅, 비와 햇빛과 바람, 온갖 살아있는 자연과 함께 하느님의 창조계 안에 있다. 나와 네가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 자연의 선물, 포도 한 알 속에도 많은 의미가 농축되어 있듯이 인간관계, 문화와 언어 등 각종 네트워크를 통해 전해져오는 풍요로움과 상처와 분열의 아픔 등 다양한 삶과 의미가 우리 각자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세상,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교회의 중요문헌인 사목헌장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다.
즉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다…. 그리스도 제자들인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사목헌장 1항)이라고 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인류와, 스승 예수께서 들어오신 세상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지난달부터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계룡산까지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오체투지로 나아가고 있다. 땅바닥에 자신의 온 몸을 대고 엎드리는 오체투지! 삼보일배보다도 더 힘들고 더욱 겸손한 자세다. 이분들은 길을 떠나며 “이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는 자신의 삶을 먼저 회심하고 비우겠다!”고 했다.
이 순례는 우리의 ‘안전’과 ‘공동선’을 위해 놓인 철도 건널목의 종소리와도 같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모인 이 사회가 올바로 가고 있는지,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를 듣는지, 그리고 사회구성원인 우리의 삶은 어떤지를 되돌아보라는 초대인 것이다. 그분들의 생각과 뜻, 시기와 방법이 나와 다르다고 하며, 그저 못 보고 안들은 체 모르는 척해도, 우리의 양심에 질문하며 진실에 귀를 기울이도록 재촉하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보여주신 생명과 사랑, 정의와 자비, 연대와 나눔의 소중함은 작은 포도알 속에, 그리고 바로 여기, 내 안에 우리 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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