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조금만 다녔으면 좋겠다.”
몇 년 전 겨울, 방학 숙제를 한다며 방에 들어가 방문손잡이에 도복 끈을 묶고 목을 매 싸늘한 주검으로 부모의 품에 안긴 어린이가 평소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 때 나이 열두 살.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는 자살이란 말의 의미조차 모를 나이에 그 무시무시한 행위를 떠올렸다면, 나아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면 우리 사회는, 특히 교육은 문제가 있어도 여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굳이 성경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천사’나 ‘천국’이란 말에 가장 쉽게 등치되는 존재이기도 한 어린이를 죽음으로 내 몬 책임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답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금방 나온다. 바로 그 또래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고 어른들이다.
‘자식 위한다’는 말로 웬만한 부조리를 미화하는 일에는 이미 일가견을 보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식마저 부조리의 동조자로 만들어가는 어른들의 행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퇴행적인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교육 현실은 올해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4월 정부의 ‘4·15 학교 자율화 조처’가 발표되고, 그 1단계 조처인 29개 지침이 폐지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초등학교에서까지 일제고사가 부활하면서 ‘시험 몰입’이 이뤄지고 있고 한동안 사라졌던 0교시, 사설 모의고사 등이 차근차근 옛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물론 이런 교육 현장의 이면에는 ‘자율화’ ‘경쟁력 강화’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기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 실질적인 자율을 줘 교육을 살리겠다는 정부의 공언과는 달리 학교 현장에서는 자율의 향기를 맡기 힘들다. 오히려 자율은 온데간데없고 경쟁적으로 사설 모의고사 횟수를 늘려 그렇지 않아도 숨 막혀 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한숨 소리만 늘고 있다.
왜 이 모양일까. 말로는 ‘자율’을 이야기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교육과정의 자율화, 교사별 평가, 시·도교육청 개혁 등 자율화를 위한 알맹이들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장 공모제가 빠져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부모와 교사가 올바른 가치관과 역량을 겸비한 교장을 선임하고, 그 교장이 학교 구성원들의 뜻을 모아 학교를 책임있게 경영하는 이 제도야말로 학교 자율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자율’은 교육 관료들과 사설학원이 휘두르는 ‘자율’을 위한 볼모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초·중·고교생의 약 77%가 사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교육비가 지난해에 비해 15.7%나 늘어났다. 자율을 빙자한 줄 세우기 교육, 입시몰입 교육 때문에 사교육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이런 글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처음 촛불이 넘실거리던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벌써 까마득한 과거인 양 어른들의 뇌리에서 지워져가고 있다.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 (이번에 친 시험점수다)
나의 가장 큰 결점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공부를 제일 잘하는 ㅇㅇㅇ를 이기고 싶다)’
어느 한 평범한 초등학생이 쓴 문장을 보며 가여운 우리의 ‘천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답답한 교육 현장에서 떠돌고 있는 ‘자율’이란 유령의 존재를 곱씹어본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