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맨 앞줄에는 육체가 있다. 승용차 문 닫다 손이 끼어 손톱 빠진 기억, 축구경기하다 돌부리 걷어차 발톱 빠진 경험은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갈 때, 발뒤꿈치 물집 주위가 화끈거리면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말 뇌졸중학회 발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국내 뇌졸중 환자는 12만7424명에 달한다. 결핵환자는 14만2000명으로 국민 341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고른 영양 섭취, 운동과 휴식 등 많은 주의를 기울임에도 육체적 고통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남의 일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에는 그나마 찾아갈 병원이 있다. 정신적 고통이 찾아오면 혼자서 끙끙 앓아야 한다. 인간은 몸이 건강할 때도 눈물을 흘린다. 최선을 다했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직장 동료들은 나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격렬한 분노를 감춘 가식적인 우정, 쉽게 허물어지는 사랑, 채우지 못한 욕심으로도 고통받는다.
미국의 영성신학자 아드리안 반 카암 신부는 이런 정신적 고통을 ‘통증’(pain)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구별해 ‘고뇌’(affliction)라고 불렀다. 고통에도 격이 있는 셈이다. 고뇌 중의 고뇌는 역시 ‘허무’다. 그 허무의 근저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인생 100년이 허무하기 그지없다.
독일의 자연과학자이며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인 만프레드 바우어는 지구 역사 30억 년을 90분 영화에 비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지구에 생명이 나타나는 것은 영화 시작 후 60분이 지난 다음이고,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석기(石器)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4.5초 전이다.
영화는 마지막 25분의 1초 동안 아프리카에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연하고, 빙하들이 녹고, 인간이 피라미드를 올리고, 서적 인쇄 기술과 백열전구를 발명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달로 날아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우주 역사 속에서의 인간 존재를 생각하면, 삶을 지탱해주던 일시적인 쾌락, 애지중지하던 소유물들, 그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진다. 참으로 덧없는 인생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도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90, 10)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하늘이 이미 내안에 덕을 부여하였다’(天生德於予, 논어 술이 23). 유한에서 무한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이미 내안에 심어 주셨다.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예수는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하느님 뜻을 신뢰했다(마태 16, 39).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다. 뱃속의 태아가 비록 인터넷 소통 방법에 대해선 모르지만, 참으로 오묘한 방법으로 어머니와 소통한다.
죽음에 대해 논리적 해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소통하며 죽음의 의미 그 자체를 살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제 얼이 다하여 갑니다. 당신을 신뢰하니 아침에 당신의 자애를 입게 하소서 … 주님. 당신께 피신합니다”(시편 143, 7~9) 하면 된다.
가을이 깊어간다. 낙엽이 거리에 뒹군다. 위령성월이 깊어간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