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일이라며 S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연인즉슨 ‘빵꾸’, 즉 뚫린 구멍을 메워달라는 거였다. 실랑이 끝에 결국 S의 설득에 넘어가 ‘구멍막이’가 되기로 했다.
하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마음과 손길들이 내 안에 뚫린 구멍들을 막아주었는가. 한꺼번에 두 가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실수들, 장애물이다 싶으면 일단 뒤로 물러서고 싶기 때문에 마주해야 했던 더 높은 벽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은 그 누군가가 나의 뚫린 구멍들을 메워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아가다가 나도 작지만 누군가의 구멍을 메워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벅차서 시간이 빨리 흐르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는데 돌아보니 한 숨 세월이다. 올해도 벌써 연말이 다가온다.
대림시기가 지나면 성탄과 함께 태양력에 따른 새해가 밝아올 테고, 또 다시 연중·사순·부활시기를 맞게 되겠지. 어찌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게 전례력이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 한 주일, 한 달, 한 해가 언제나 같은 주기로 돌아간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되풀이의 연속인 것을.
어릴 때 읽은 동화 중 무인도에 갇힌 사람이 날짜를 알 수가 없어서 날마다 벽에 표시를 하기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삶의 주기를 만든 것은 우리네 인간이다. 그러고는 가끔 그 틀이 갑갑하다고 몸을 뒤틀 때도 있으니….
문제는 마음이 아닐까. 시간의 흐름과는 달리 내 마음은 어제에 머물러 있거나 내일로 앞질러 간다면, 혹은 그 마음을 오늘에만 묶어둔다면 시간과 내 마음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시간이 흐르듯 마음도 흐르게 할 일이다.
이혜정 (에밀라스, 까리따스수녀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