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위해 적어도 천 시간 이상을 바쳤는데도 영어를 잘한다는 학생이 드물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원인을 찾아서 바로 잡아야 한다. 만약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열심히 성당에 다녔는데도, 여전히 세상에 미련이 많고 욕심과 갈등이 많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위기에 부닥친 두 사람의 신자 중 한 사람은 차분하게 기도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절망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한다. 두 사람의 행동이 왜 이다지 다를까. 인간에게는 겉마음(의식)과 속마음(무의식)이 있다. 전자는 속마음에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속마음에 신앙이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속마음 깊숙이 형성되는 것이라서 평소에는 잘 관찰되지 않는다.
종교학자들은 속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신앙심을 신앙체제라 한다. 신앙체제는 마음 속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까닭에 좀처럼 표면에 떠오르지 않지만, 당사자의 구체적인 행동에서 시시때때로 드러나며,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불교는 신앙체제를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로 구분하지만, 우리는 청원태(請願態), 희구태(希求態), 제주태(諦住態)로 나누어 생각해본다.
청원태는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petition)을 주로 하는 신앙심을 뜻한다. 삶에는 해결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이 항상 발생한다.
펀드나 주식 값이 내린다. 먹고 살 길이 막연하다. 남편이 아프다. 아이가 수능을 본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 매달린다. 은연중에 기적이 일어났으면 한다.
희구태는 경전에 나오는 이상에 따라 살고자 할 때, 형성되는 신앙심을 뜻한다. 성경의 이상대로 사는 것은 힘들지만,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데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사람이 갖는 신앙심이다. 이 단계에 와서 비로소 속마음 속에 종교적 가치체제가 편성된다.
제주태는 경전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 갖는 신앙심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해명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 바로 이러한 궁극적인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체험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한테 의지하고 매달려 살았다. 부모님도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자식을 예뻐하셨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렇게 산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이가 차면 부모님이 하신 좋은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때가 되면 부모님처럼 훌륭한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린애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미련과 욕심이 많다면, 공동체에 대한 문제보다 자기 개인적인 문제로 항상 고민하고 있다면, 마음이 편치 않고 뒤틀려 있다면, 세상을 원망하고 있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이 송곳 끝처럼 좁아진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해결해달라고 주로 기도했을 뿐,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을 등한시 한 데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약하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매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삶과 인식과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사물처럼 외부의 것에 휘둘리면서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궁극적 진리를 깨달은 사람도 있고, 자기의 이속에만 밝은 사람도 있다. 고귀한 감정을 느끼고 사는 사람도 있고, 천박한 감정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신앙체제의 상승에 따라 우리의 삶과 인식과 감정이 달라질 것이다.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자기 것만 아는 인식에서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인식으로, 천박한 감정에서 고귀한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의 속마음도 달라질 것이다.
속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평생 남에게 보이려고 처신을 하고 살든지 화병을 견뎌내려고 속절없이 애쓰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정한 속마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내적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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