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앞두고 착한 일을 하고 싶었던 우리 다섯 명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카드를 만들어서 팔기로 했다. 모두들 그림 솜씨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던 순진한 여고 시절이었다.
우리는 카드를 팔아 모은 돈으로 라면 일곱 상자를 사 들고 경기도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을 찾아갔다. 하지만 한순간 뿌듯했던 마음이 단숨에 추락하는 날개가 되고 말았으니….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대하듯 반가워하시며 내미시는 한 나환우 할머니 손을 그만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다. 무지의 탓이기도 했지만 피부만 닿아도 나병이 옮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착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자기만족이 아니었던가 싶어 한동안 자괴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필자가 수도자가 된 후 우연히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나환우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때 찾아온 낯선 수녀가 왜 그렇게 당신들의 손을 맞잡고 싶어 했는지, 썩어 문드러진 그 손을 왜 그토록 쓰다듬고 싶어 했는지를….
성탄을 앞두고 아기 예수님을 모실 구유를 꾸미며 새삼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기다리던 하늘 아기를 맞이할 기쁨에 설레면서도, 혹시나 마음이 다른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꽉 차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하늘에서 땅까지 내려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도 가까운 이웃에겐 닫혀 있는 마음은 아닌지를….
가난한 여종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탄생케 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비운 가난한 자리에 하느님의 뜻을 품음으로써 충만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혜정(에밀라스.까리따스수녀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