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나 여행으로 외국에 나갈 때면 잔뜩 긴장을 한다. 보는 사람마다 소매치기이고 날강도 같은 느낌이 든다. 5년 전 이탈리아 로마에 갔다가 벌건 대낮에 지하철에서 날강도를 경험한 것도 작용했겠지만, 소매치기나 날치기의 공포는 큰 스트레스의 하나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치안은 대단히 좋다. 천성이 착한 데다 경찰의 열성어린 순찰 덕분에, 우리는 일본에 뒤이은 치안 선진국을 자랑한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우리를 도저히 따라오지 못한다. 그런데 국민들을 대상으로 치안상태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면, ‘나쁘다’고 대답하는 시민이 많다. 범죄발생 통계와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치안’은 다른 것이다.
지난해 발생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파동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에서 스테이크를 먹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맛좋고 저렴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왜 우리 시민들은 미국산 쇠고기에 광우병이라는 낙인을 찍고 급기야 촛불을 들었을까?
전문가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더 낮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표현이겠지만 이것으로 충분할까? ‘만일’(萬一)이라는 말이 있다. 만 번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일 정도로 낮은 확률이다. 하지만 확률이 낮으면 안심해도 좋을까?
흥미롭게도 범죄백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강도를 당할 확률은 만분의 일이다. 2005년에 발생한 강도 건수는 4,684건. 인구 4800만 명으로 나누면, 강도를 당한 확률은 1만 247분의 1이다. 만분의 1보다 낮으니까 안심하라고? 더 확률이 낮은데도, 심심찮게 벼락 맞아 죽는 사람이 보도되지 않는가?
‘구운 게도 다리를 떼고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굽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물지 모르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세심하게 주의하라는 교훈이다. 만일의 사태를 예상해서 대비하는 일, 유비무환이야말로 정부의 역할이다. 국가안보도 그렇고 치안도 그렇다. 확률이 낮으니 무시해도 된다면 군대도 경찰도, 아니 정부도 필요없게 된다.
안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안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거의 없다지만, 안전하니 안심하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다. ‘안전’과 ‘안심’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부 당국자들은 안전보다 안심을 우선해야 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기에 앞서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국민보다 한술 더 떠서 철저하게 미국의 검역절차를 검증하고 도축장의 위생 문제를 따지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대통령과 정부가 취한 태도는 정반대였다. 심지어 여당 의원들은 식당에 둘러앉아 텔레비전 카메라를 앞에 두고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먹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미국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해댄 것이다. 국민의 불신과 불안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위험과 직면한다. 시내에 나가니 ‘사망 2명, 부상 112명’이라는 현황판이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전날 발생한 교통사고 사상자였다. 그런데 이처럼 구체적인 죽음의 수치를 목격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버스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보다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객관적인 지표로만 위험성을 파악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감정 시스템이다.
국가안보든 치안이든 식품안전이든, 안전문제를 다루는 정책 당국자들은 먼저 국민을 배려하는 습관을 체득해야 한다. ‘이렇게 안전한데도 안심을 못하느냐?’고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촛불시위를 매도하고 막을수록 불안과 불신만 증폭될 뿐이다. 국민의 감정적인 측면을 배려하고 불안과 우려를 이해하는 노력이 병행될 때, 비로소 안전은 안심으로 승화된다.
‘안전’과 ‘안심’은 별개의 문제다. 과학적인 수치로 안전은 증명할 수 있겠지만, 안심은 그렇지 않다. 안심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전은 안심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못 된다. 보다 낮은 자세로 ‘내 탓이오’를 외치며 국민을 이해하려는 노력, 새해 정부에 바라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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