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새해 첫날 일기장에 다짐했던 각오와, 새해 첫날 새벽미사에서 다짐한 나 자신과의 약속은 너무 이르게 희미해져만 간다.
아침부터 뭔가 이유없이 짜증스럽다.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해진다. 날씨마저 흐리고 맵고 차다. 창밖은 어둠이라도 내릴 듯 어둑어둑하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니 날씨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몸에 감기기운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걸음이 느려지고, 말수가 적어지고, 가슴이 바위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이 무겁다. 이런 날은 많았다.
그렇다. 이것이 내 오랜 지병인 것이다. 그냥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울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울하다고 스스로 말해버린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행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불행하다. 이런 내 모습이 정말 싫다. 날씨에 민감해져 ‘우울’이니 ‘불행’이니 하는 말을 머금는 내가 싫다.
새해를 맞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새해 첫 새벽미사에서 간절하게 무릎 꿇고 간간이 눈시울까지 적시며 기도한 나의 신앙은 벌써 주무시려 하는가. 적어도 내 나이 즈음에는 외부적 조건에 의해 자신의 기분이 좌우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 도착했다. 교수실 문을 노크한다. 누굴까. 들어오라고 말한다. 낯선 여자 하나가 들어온다. 나는 좀 귀찮은 듯 묻는다. “누구세요?”
손에는 최근에 나온 내 시집 두 권이 들려있다. 그녀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시집을 내 앞으로 내밀며 말한다.
“선생님 사인 좀 받으려고요. 시간을 빼앗았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갑자기 의기충천한다. 「열애」라고 붉게 써진 제목의 시집은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듯 나를 배부르게 한다. 사인을 하고, 또 한 권의 시집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가져온 사진기로 사진도 찍었다. 그녀는 차를 한 잔 하고 돌아갔다. 시간은 15분 정도다.
나는 갑자기 햇살이 눈부시게 밝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듯, 마음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시집은 칠천 원이다. 두 권이래야 만사천 원. 그러나 그 값어치는 수천수만 배로 늘어나 내가 셈할 수 없는 몇 조원까지 치닫는다. 그것은 순간의 찰나였지만, 내가 사는 이유로 나를 감싸 안는다.
시(詩)란 뭔가 더러 자존심도 왕창 상하고, 별 돈도 되지 않고, 고통이라면 고통인데, 그 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아침나절의 그 어둡고 시린 어깨가 갑자기 따뜻하고 포근해진다.
그러면서 나는 말한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아니냐고. 마치 누가 우울하다고 하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라도 할 기세다. 그러나 이 기쁨이 얼마나 갈 지는 모른다.
그녀가 돌아가고, 난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금세 그 두 권의 시집과 나를 찾아온 여성은 기억 속에 희미해진다. 나는 그 성의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적는다. 다음에 또 우울해지면 그 수첩을 보겠다고. 그러나 금세 잊는다. 다른 기쁨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생은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망각’ 때문에 우울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기쁨을 너무 쉽게 잊어버려서, 그래서 불행하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내 집의 공부방은 일층이다. 창밖에는 언제나 나무가 있다. 빈 가지만 출렁이는 나무를 보는 일도 나는 좋다. 그 나뭇가지에 새 싹이 돋아도, 그 잎이 신록이 되고 녹음이 되고 단풍이 들어 낙엽이 져도, 나는 창밖의 나무들이 다 좋다. 때로는 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재미만 있어도, 세상 사는 재미는 꽤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인자를 꺼내고 싶다. 누군가의 말처럼 착한 인자 통장을 만들어 아깝지 않게 꺼내 쓰고 싶다. 두루두루 남들에게 나누는 착한 마음을 저축하고, 그것을 나누는 일을 새해 과제로 생각하고 싶다. 그 마음들이 이웃에게 전달되면서 내 착한 인자들이 더욱 살찌고 뚱뚱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변덕스런 내 마음도 진정한 내 모습을 지니지 않겠는가.
사람과 사람의 소통, 이것이야말로 생의 에너지며 살아가는 힘이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사람들과 늘 함께 계셨다. 사람들과의 대화로 생기를 찾아 주시는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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