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뀔 때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이 있다. 전쟁 방지와 평화 구축이라는 화두다. 사전적 정의로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세상의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평화를 뜻하는 유대교의 살롬(salom), 그리스의 에이레네(eirene)와 로마의 팍스(pax), 중국의 화평(和平), 인도의 샨티(santi)는 모두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평화의 주요소로 삼는다.
이렇듯 평화라는 어휘는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인데, 2009년 지구촌의 상황은 평화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새해 첫 새벽이 밝아오기 무섭게 들려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 사이의 분쟁 소식이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분쟁은 왜 끊이질 않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가.
팔레스타인 분쟁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역시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은 아브라함의 한 핏줄인 적, 서자로 출생하여 장구한 세월을 반목과 질시로 보내는 사이 종교마저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동일한 언어, 식생활, 일상문화를 지녔지만 이 두 민족만큼 견원지간의 원수가 되기도 힘들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가나안이라 불리던 지역이 BC 12세기 무렵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점령 통치하면서 바뀐 지명이다. 이 지역은 유대와 이스라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마케도니아, 로마, 아랍, 오스만투르크 등 수 많은 나라들에 의해 차례로 지배당했다. 좁은 지역치곤 참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오스만투르크 멸망 이후 이 지역에는 아랍인들이 국가와 통치기구 없이 살고 있었는데, 제1차 대전이 터지면서 이 지역은 영국령으로 포섭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진짜 비극은 바로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들은 영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전쟁 비용 지원을 대가로 종전 이후 옛 유대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 영국 정부가 이스라엘에게도 승낙을 하고, 팔레스타인에게도 반대도 승낙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사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불러 모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2천년을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기고 난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땅은 우리 선조의 땅이다. 그 근거는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한 마디가 이스라엘의 건국 명분이었다. 이스라엘의 강경 시오니스트 계열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유대인만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의 테러가 잇따르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강대국의 이중적 외교방식으로 빚어진 팔레스타인 사태는 몇 차례의 중동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대외정책은 이스라엘 지지 일변도이고,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입지를 전혀 갖추지 못한 것이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본질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 세력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인간 사회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라는 의미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막연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싶다. 지구촌의 정의가 어느 새 초강대국이 휘두르는 패권질서에 상당히 좌우되는 현실을 보면, 과연 우리가 어떤 정의를 따르고 실천해야 할 지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고, 난제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말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부터의 평화와 정의를 보듬는 일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 특히 고아와 과부, 병자와 장애인, 그리고 가난한 사람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데 온 마음과 힘을 쏟으셨던 평화주의자 예수가 우리가 따라야 할 정의와 평화의 본질일 수밖에 없음을 가슴에 되새기면서 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