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일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계시는 리오 교수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 전에 미국에서 그분을 만나 뵙고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슬픈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인디언이었던 그분은 알코올 중독자들의 회복을 위한 영적인 스승 역할을 하신 분이셨다. 나에게도 중독회복에 있어서 영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
신부님은 2001년 가을 어느 날 처음 만났을 때 “한국에서 중독자들이 회복하는데 영적으로 큰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다.
그동안 대학원 공부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도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난해 말 시간을 쪼개서 3년 만에 그분을 찾아뵌 것이다. 지금도 신부님의 해맑은 얼굴과 편안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직 그분으로부터 중독자들을 위한 영성을 더욱 배워야 하는 입장이기에 아쉬움이 크다.
이제 그분이 나에게 남겨주신 숙제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내가 한국에서 중독자들의 회복을 위한 영성에 더욱 매진하는 것이다.
# 나는 과거 아주 많은 날들이 외로웠다.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외딴 무인도. 그 외로움은 사제이기에 앞서 나약한 한 인간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한때 술을 마시면 앉은 자리에서 소주 8병, 맥주 24병을 위에 쏟아 부어넣곤 했다.
딱 한 잔 하려 했는데
한 병 두 병 세 병도 모자라고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네
내가 어디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 와
지난 밤 후회만이 가슴을 짓누르네.
(시집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 시는 내가 알코올중독에 빠져서 방황하던 시절, 솔직한 고백의 한 단면이다. 술은 나의 몸을 파괴했고, 결국에는 영혼까지 무너뜨렸다. 난 술을 마시면서 술에 대한 조절능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사목생활과 나의 건강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는 이유를 늘 외부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비겁자였다.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을 때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들려 왔다.“머리는 상처투성이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맞아 터졌는데도 짜매고 싸매고 약을 발라주는 이도 없구나.”(이사 1, 5~6)
하지만 10년 전부터 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중독치료를 받고, 술 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술에 빠져 혼자라는 생각으로 무인도에서 방황하던 시간에도 하느님은 내가 술을 내동댕이치기를 자비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내 안에서 묵묵히 기다리셨다. 하느님의 기다림에 한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알코올중독병원에 입원하고 나서였다.
# 명심보감은 ‘부모가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많은 책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주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이 모르는 사이에 선행을 해서 음덕을 남겨주는 일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물려준 가장 값진 유산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성모님께 대한 기도’였다. 이 같은 어머니의 신앙이 바탕이 되어 삼형제가 나란히 사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성 유스티노 고백처럼 “나는 부모로부터 크리스천 신앙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장례식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자녀들에게 줄 묵주를 자녀 숫자대로 준비한 것을 발견하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올해 우리는 자녀들에게 명예와 돈 보다는 올바른 가치관과 윤리에 입각한 삶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 만일 중독의 삶을 살고 있다면 금년에는 반드시 중독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이기를 바란다.
오늘도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태양의 잔광이 사라질 때까지 아쉬움으로 바라보면서, 나도 어머니처럼 하늘에 부끄럼없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립고도 그리운 하늘나라로 환희에 찬 마음으로 소풍을 떠날 수 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부족한 나를 도와주고 기도해 주신다’는 믿음 안에서 오늘 하루의 삶과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 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 나의 바람을 간구해 주시는 성모님의 사랑. 나를 위해 평생 기도와 희생을 바치신 어머님의 사랑으로 나는 오늘도 단주호 방주를 타고 술이 가득한 세상을 용기 있게 헤쳐 나가련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는 더 행복하소서
훗날 어머니를 만날 믿음으로
어머니의 그리움을 내 가슴에
두 겹 세 겹 감싸고 살렵니다.
(시집 「그리운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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