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이었다. ‘봉헌생활’이란 청빈(가난), 정결, 순명을 서약하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삶을 말한다. 또한 봉헌생활은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증언하고 전파하는 삶이다.
하지만 최근 몇몇 수도자들의 삶은 그 지향점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도직 활동과 기도 생활의 균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도직 활동에 매몰되는 오류를 보이기도 한다.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인격 성숙의 열매조차 제대로 성취해 내지 못하는 수도자들도 있다.
더 나아가 최근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용(實用)의 문화가 수도회에도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다. 수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용과 건조한 합리주의 사고형태에 물들지 않았는지 늘 성찰해야 한다. 기도 생활 자체가 기도의 즉각적인 효과를 보고 싶어 하는 실용적 태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봉헌생활도 인간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화해 왔고,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징표에 열려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랜 가톨릭 역사안에서 수많은 영적 스승들이 이러한 ‘열려 있음’이 때로는 ‘선(善)을 가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고 경고했다. 수도자들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더 큰 수도회의 선익을 위해서’‘공동체를 위해서’등의 말들이 지니고 있는 함정을 읽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열매가 외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는 맺는다. 작은 씨가 자라서 큰 나무되어 열매를 맺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맛있는 열매를 내준다. 성체 앞에 오랜시간 앉아 있어서 훌륭한 수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수도자가 성체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다.
덕(德)이 없는 수도자는 영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그 덕과 높은 인격의 맨 앞줄에 사랑이 있다. 교회가 수도자들에게 ‘살아있는 사랑’을 실천해 달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쉬운 길이 아니다. 영적이고 인격적인 성장의 길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한다. 투쟁이 필요하다. 투쟁의 고통을 피해선 안된다. 그 투쟁이 혼자서 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요즘, 많은 평신도들이 ‘삶’ 그 자체와의 투쟁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영적, 인격적 진보를 위해 싸우지 않고 편안히 타협한다면 그것은 수도자의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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