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설 명절 즈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내 가슴이 따뜻해지곤 한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기억들이 솟구쳐 오른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외모를 가졌을 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고, 늘 일기를 쓰셨다. 갑자기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 모든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에는 벌떡 일어서는 습관이 있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고, 또 인생의 수많은 행과 불행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늠름했던 모습과 절망하던 모습의 두 부분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늘 나를 아프게 한다. 모든 부와 명예를 잃고 육탈한 모습, 그리고 빈손으로 초라하게 눈 감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입술을 깨물게 된다. 내 집에 단 한 번도 모시지 못하고 병원에서 돌아가시게 한 나의 불효는 내가 지금 이 순간부터 무릎걸음으로 살다 죽는다 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길을 운전할 때나 무서운 골목길을 걸을 때면 나는 한번씩 ‘아버지’하고 불러본다. 그러면 저 멀리 아버지가 서 계신 듯 마음이 편안하다.
명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아버지를 떠올리고 불러볼 수 있다. 그래서 좋다. 아버지를 부르며 당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약속’이란 단어다. 아버지는 늘 너그러운 분이셨다. 특히 나한테는 더욱 그러셨다. 내가 잘못을 하더라도 반성하고 뉘우치기만 한다면 아버지는 늘 용서해 주셨다.
그런데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버지께 야단을 맞아야 했다. 아버지는 약속에 대해서만큼은 벼락같은 고함을 치시며 얼굴을 붉히셨다. 평소의 아버지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와 약속을 잡으면 10분 전에는 늘 미리 그 장소에 가 있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거의 병적으로 서둘게 된다. 때로는 그 장소에 너무 빨리 도착해 혼자 거리를 걸으며 기다리곤 한다.
나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상대방에게 오히려 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든다. 약속이란 건 상대방과 시간을 맞추는 것이지, 혼자 일찍 가서 기다리며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데 말이다.
이러다보니 ‘좀 늦게 오세요’란 말을 종종 듣게 됐다. 어느 후배는 약속 시간에 5분만 늦어도 내게 사과전화를 한다. 아버지는 내게 ‘남의 시간을 뺏는 일도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교훈은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약속에 관해서는 어머니 역시 예민하셨다. 어머니는 글자도 모르셨고, 학교 앞에는 가보지도 못한 분이셨다. 그러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목숨을 걸 정도로 싫어하셨다. ‘약속을 안 지키면 그게 사람이냐’던 어머니는 시장에서 약간의 외상이라도 하고 오면, 다음날 그 돈을 갚기 위해 새벽같이 시장으로 달려 나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자주 의견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약속 지키기에는 두 분이 한 마음이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딸이라는 것에 너무 감사드린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 적어도 약속 지키는 것만큼은 인격의 최전선까지 달렸던 엄마로서 기억되기를 바란다. 늘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처럼 우리 아이들이 엄마를 병원에 오래 머물게 하거나,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편하게 모시라는 것이 아니다. 엄마 때문에 늙어서도 후회하거나 가슴 아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게는 부모님처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분이 또 한분 계시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도 명확히 따지자면 우리의 혈육이다. 그 사실이 눈물겹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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