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외출 중에 들었다. 모처럼 딸들과 영화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문자 메시지와 함께 전화가 연이어 걸려오고, 그때부터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명동성당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끝까지 영화관을 뜨지 않았다. 김 추기경님의 평소 사랑으로 추측하건데, 추기경님께선 내가 모처럼 딸들과의 외출을 즐겁게 보내는 것을 더 원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웃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아파오며, 어떤 균형에 균열이 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의 관절이 삐걱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 추기경님이 선종하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렇지. 그래야지.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 분이 가셨는데 나도 무언가를 해야지.
그러다가 다시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무언가 하겠지만, 아니 반드시 해야겠지만, 너무 뻐근하게 야단을 떨고 너무 시끄럽게 법석을 떨다가 오히려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그분은 평소 그런 것을 싫어하셨다.
우리는 늘 그래왔다. 무슨 행사처럼 남보란 듯 법석을 떨고, 그 법석을 통해 무언가 했다는 자족감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에 자신을 과장시키며 스스로 안심해왔다.
그러다가 반드시 해야 할 몫에 대해서는 빈 틈을 보이며 놓쳐왔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나 나는 힘주어 말한다. 이번만큼은 우리 모두 김 추기경님의 삶과 영혼을 회고하며 오직 그분을 위한 움직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김수환 추기경님은 자신과 가족, 종교와 국적을 넘어 모든 인류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셨다.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추기경님께 “신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느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답하시는 것을 들은적이 있다.
그렇다. 그 분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분이었다. 하느님께서 그 분을 원하셨고, 그 분은 소명으로 답하셨다. 그 영성의 관계를 추기경님은 단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분에게는 1초의 시간도 하느님을 위한 그것이었다.
김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미소’와 ‘엄격’이란 두 가지 전혀 다른 표정이 생각난다. 그러나 어긋난 사회를 교정하기 위해 세상의 어른으로서 보여주신 엄한 얼굴도, 모든 약자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던 부드러운 얼굴도 모두 하느님이 주신 얼굴이었다.
언젠가 명동성당에서 김 추기경님을 잠시 찾아뵌 적이 있다. 그때 추기경님께서는 “하느님은 시인을 특히 사랑하실거야”라는 말씀을 건네셨다. 김 추기경님의 그 한마디 말씀으로 나에게는 강력한 ‘빽’이 생겼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하느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다만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여기 있다’, ‘여기 없다’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김 추기경님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일상 속에서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 일상 속의 증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추기경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명동에는 끝없는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남아있는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 새로운 삶의 지표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 그분의 영면에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김 추기경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중대한 발언에 동참하는 일이야말로 그분의 인자한 미소에 답하는 일이며, 노면 고르지 못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이 시대의 ‘마지막 기둥’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