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철이 온갖 들꽃들이 피어나는 부산 베네딕도 수녀원을 일년에 서너 차례는 찾는다. 이곳은 혼자 와도 어색하지 않게 맞아주기 때문이다.
수녀원을 방문한 어느날.
로사리오 기도의 숲, 바람은 작은 나무들을 흔든다. 지난 여름 토끼풀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풀밭 둘레 둘레에 그리움처럼 길다랗게 피었던 백합이 눈에 삼삼하게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문득 수녀님 한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오래 전 빗 속의 수녀원에서 받았던 쓸쓸한 정감이 생각나 혼자 수녀원 뜰을 걸었다. 수녀원에 들어서자마자 도라지 꽃이 보랏빛과 흰빛으로 뒤섞여 별처럼 와르르 피어 있었고 왼편으로 파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파밭을 보며 불현듯 이해인 수녀님의 파꽃이란 시를 생각했다. 그도 이곳에서 서성거렸으리라. 그런데 파밭 사이사이 꽃대가 긴 노란 꽃이 마음을 당겨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수녀님 한분이 우산도 없이 도라지꽃을 따고 있었다. 제대에 꽂을 크고 색이 선명한 색을 고르느라 옷이 젖어있었다.
이꽃은 상사초예요. 개상사화라고도 하는데 수선화과에 속합니다. 잎이 봄에 나와 초여름에 없어져 꽃과 잎이 서로 못만나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상사초란 이름을 가졌대요라고 말한다. 그리곤 뜰을 함께 거닐며 여러 꽃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우산을 받쳐 성당까지 함께 갔다가 수녀원을 막 나서려는데,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 수녀님은 도라지꽃 다섯 송이를 손에 황급히 쥐어주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성당 쪽으로 달려갔다.
수녀님께 받은 그 도라지꽃 다섯 송이는 그날 이후에도 한 동안 내 마음에 피어있었다. 그리고 그후로 목이 긴 슬픈 상사초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