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엔 여름 땡볕을 견뎌낸 곡식들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 절기는 말복에서 처서를 향하고 있다. 폭우 뒤에 폭염으로 밤잠을 설치며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해왔다. 살아가는 동안의 고난과 시련과도 같은 여름의 수난을 겪으며 가을을 맞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값비싼 대가로 치루어야한다는사실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대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처럼 느껴 지기도하고….
그러나 가을은 온다. 힘겹게 여름을 넘기며 정직하게 구슬땀을 흘린 사람들에게 가을은 먼저 온다. 복날에는 벼가 나이를 한살씩 먹는다는 얘기가 있다. 벼는 줄기마다 마디가 셋이 있는데, 이것이 복날마다 하나씩 생겨서 말복에 비로소 이삭이 패게 된다는 것. 사람들이 나이를 먹게된다는 것도 자연의 이같은 섭리와 같지 않을까? 삶의 고비마다 있게 마련인 고통과 시련을 슬기롭게 넘기며 나이 한살씩을 먹어간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살아가며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지사지’의 정신
처서 무렵이면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모기가 가을의 문턱에서는 힘을 잃고마는 것이다. 이런 때에 굶주린 모기에게 피 한방울 적선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랴. 큰 병을 옮기지 않는다면 산과 바다에서 모기에게 뜯겨보는 것도 삶의 여유이고 너그러움일 수 있지 않을까? 제나라의 환공은 덕망이 높은 군주였다. 어느날 잠을 자다가 모기장 밖에서 우는 모기소리를 들었다. 『모기도 생명인데 먹어야 살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에 몸을 모기장 밖으로 내놓고 모기에게 뜯겼다. 모기들도 환공의 높은 덕을 알았던지 감히 뜯지 못했는데 무식한 몇놈이 달려들어서 너무 포식한 나머지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웃자고 한 얘기지만 환공처럼 마음을 좀 너그럽게 갖고 이 막바지 무더위를 견디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입장과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할 때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더울 때는 추웠을 때를 생각하고 넉넉할 때는 부족했을 때를 생각하는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고, 아흔 아홉을 가지면 하나 더 채워서 백을 만들고 싶어지는게 사람의 마음인지 모른다. 20세기 마지칵 광복절을 보내며 새천년을 행한 비전이 제시되고,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의 정책들이 풍성한 메뉴처럼 내놓아졌다. 희망찬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란 것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것이다. 내년에 만달러 국민소득을 다시 이루고, 2002년에 만 2천달러의 소득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 희망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목표만 있고, 목적의 제시가 없다면 그것은 한낱 숫자놀음일 수가 있다.
만 달러, 만 2천 달러 소득을 통해 우리가 함께 누리는 진정한 복지국가가 실현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고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부패는 더욱 만연할 수 있고 부익부빈익빈의 격차는 더욱 커질 수가 있다. 벼들이 익어가는 들녘에 나가보자 벼들이 어떻게 익어가는지, 가을이 어떻게 오는지를 보자,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 서로 의지해 몸을 묶고, 거센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그들의 생명력을 보자.
겸허한 태도 가질 때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운명에 대한 사랑과 자기 희생을 통한 실천적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은가? 가을이 온다. 가을 들녘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고개숙인 벼처럼 우리도 겸허해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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