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그러한 참극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았겠지만 신축교안의 참극이 제주도에서 벌어졌었다.
수백명의 생명이 무참하게 학살 희생되었으며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이런 과정에서도 사태가 제국주의 열강과 대결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지 않고 소요가 가라앉았음이 다행이었다.
극한적인 전투가 벌어진 와중에서도 프랑스 성직자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구원 요청에 의해 제주도에 나타난 프랑스 군함은 두 차례나 머물며 시위를 벌였으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을 뿐 제주도에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성직자를 살해했더라면 제주 신축교안은 외세와의 정면 충돌로 치닫게 될 위험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제주도와 교회는 본의 아니게 프랑스.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반도 침략의 계기를 제공하는 허물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처럼 많은 교도들을 색출하여 진멸(盡滅)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민군 지도자들도 그들의 진중을 드나들며 성직자 살해를 사주하는 일본 밀어업자의 제안을 끝내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1866년 병인박해 때 살해당한 프랑스 성직자의 문제로 두 차례에 걸쳐 군사작전을 펴 1개월 이상이나 강화도를 무력 점령하고 조선왕국에 굴복을 강요한 전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교구 주교와 프랑스 공사관의 요청으로 제주도에 나타난 프랑스 해군세력은 시위적인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펴기만 했지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전쟁사태가 벌어지지 않았기에 침략의 기회를 노려 제주도에 나타났던 일본군함의 사건 개입의 기회를 봉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적으로는 무고한 인명이 무참히 살육되는 비극을 벌이면서도, 밖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켜나가려는 현명함과 신중함이 발휘되었었다. 신축교안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다기(多岐)적인 것이어서 복잡하다.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방관, 전교성직자, 교인들 그리고 제주민인도 나름대로의 책임이 있었다. 제주 신축교안은 이 점에서 관폐(官弊)겮셕?稅弊) 그리고 교폐(敎弊)가 얽혀 빚어낸 사단이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교안이 그렇듯이 외국 전교자들의 전교의 자유는 허용되었으나 한국인의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엉거주춤한 시대상황, 서양 각국인이 치외법권적 존재였던 근세적 개항정책의 모순 등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은 시대적 한계성이 배경이 되어 남해의 고도 제주에서 가장 대규모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는 교안을 초래했던 것이다. 신축교안을 제주도민의 반봉건.반침략적 민란이요, 근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성격지으려는 일부 사학자의 독단은 재고되어야 할 성격규정이다.
신축교안은 교회와 교인 그리고 교회에 부동하는 인물로 단정된 세력에 대한 일부 제주도 지방관료의 뒷받침을 받은 민인의 소요이기에, 수탈과 토색 그리고 관료의 사회적 행폐를 일삼던 봉건적 지배세력에 대해 민인들이 궐기했던 종래의 민란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오히려 민군측이 봉건지방관료인 제주출신 지방관들과 결부된 소요였다.
한편 천주교는 중세적 전통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인간의 평등,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나눔을 강조하는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당시 제주도민들의 미신적 미혹, 사회적 폐습과 계층적 차대를 시정하려는 존재로 제주사회에 나타난 신앙체계였다.
다만 선교를 서두른 나머지 제주민과의 대화를 소홀히 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부식(扶植)하는데 조심스럽지 못한 면이 있었던 것이 문제되어 교안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투쟁의 대상이 된 교회는 봉건 묵수(墨守)의 가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존재였다. 그러기에 교회는 유교적 위정당국자에 의해 오랫동안 박해 받아온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종교교단과 교회 구성원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신축교안을 반봉건적 민란으로 규정함은 재고해야한다.
신축교안을 반침략겧北┗뮐聆?근대적 민족운동이라고 단정함도 문제가 있다. 신축교안에서 민군의 공격대상이 교.민 간에 벌어지는 사안에 과민 대응하는 양대인 프랑스 성직자와 한국 성직자 그리고 그에 부동한 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제주도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활동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고 봄은 부당한 생각이다. 좥양대인좦으로 치외법권적 특권존재였던 프랑스 성직자가 행정질서를 어기고, 국법 집행에 지나치게 관여한 허물은 비판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주의 첨병으로 감행한 행위는 아니었다. 자기 신도, 자기 교회 옹위를 ㎸?과도한 행위를 수반한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이들과 그에 부동한 교인들의 이른바 교폐(敎弊)가 제주민인에 아픔을 가하고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었지만, 바른 역사이해를 위해서는 그런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동기를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신축교안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 군함 2척이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제주성이 함락된 직후인 5월 30일∼6월 2일의 3일간, 6월 9∼13일 5일간). 한편 6월 3일에 일본 군함도 제주에 나타나 정세를 묻고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제주해역에서 맴돌았다. 프랑스 군함이 급거 중국에서부터 회항해 온 것은 주조선프랑스공사의 급보를 접하고 자국인 프랑스 성직자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것인 동시에 교민 피난을 돕기위한 출동이었기에 별다른 과격한 군사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신축교안을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회로 이용하려 했다면 보다 강경한, 보다 전투적인 행위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성 함락후 아직 불안한 제주 성내를 돌아보고 성직자와 교인들이 목포로 피난하는 일을 도와주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한편 신축교안에서 궐기 투쟁한 제주도 민군이 반침략.반제국주의적 민족의식을 가진 투쟁이었다면, 1883년 한일통상장정 체결 이후로 제주도 어장에 불법적으로 출어하여 제주민 생업에 막심한 침해를 가하고 있던 일본 밀어업자와 접촉치 않았어야 했다. 신축교안이 벌어지는 전후기는 일본정부의 계속적인 제주해역 출어 강요에 대해 제주도민들이 일본인 제주 출어 시기의 연기를 주장하고 나아가 격렬한 영파(永罷)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그 제주도민의 거센 반대운동의 대상이었던 일본측과 야합할 수는 절대로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밀어업자와 자주 접촉했고 무기까지 제공 받았던 것이다. 이상 몇가지 일을 고려할 때 신축교안을 반 제국주의 투쟁이라고 잘라 말함은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학의 입장에서 신축교안의 성격을 논함에는 보다 심층적 연구와 세계사적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특정지역에서 벌어진 양상만으로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거나, 도식적인 이해나 교조적인 선입견을 가지고서 논단함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할 수 있기에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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