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들은 법학박사 임기석 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가 지난 97년 1월 27일 확정된 교회용어에 따라 개정된 미사전례문이 사용된 지 2년 반을 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본당미사 등 각종 전례에 참여해 오면서 느낀 점 등을 적은 것이다.
국어에서 「…여」라는 말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를 보면 받침이 없는 체언(體言) 다음에 붙여서 느낌이나 호소(呼訴)를 나타내는 토라고 되어있다. 「동포여! 궐기하라!」 「신이여 도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등 무엇을 간절히 갈구하고 호소하는 데 쓰는 감탄 또는 호격조사이다. 따라서 「여」라는 말은 자연히 터져나오는 감정이 극치에 이를 때 나오는 소리이고, 깊은 정서적 표현의 일종이다.
이러한 토는 인칭, 비인칭은 물론 존칭, 비존칭에 모두 사용하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경우에도 미묘한 차이를 두고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성모여! 성하여! 각하여! 임이여! 형이여! 아우여! 스승이여! 제자여! 꼬마여! 숲이여!(인칭) 하늘이여! 별이여! 바다여!(비인칭/의인화) 등등이다. 이들은 감탄조사지만 단순한 감탄조사와는 다르다. 강렬한 호소, 엄숙한 선언, 애절한 절규, 황홀한 외침, 경건한 갈구가 들어있다.
또한 이 감탄조사는 사용하는 경우에 따라 존칭과 친칭, 애칭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말이 존칭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여」가 들어가는 곳에 천편일률로 존칭어 「…님」을 대입시켜서 사용하는 것은 타락된 평준화이다. 「교황성하」, 「각하」는 그 자체로 존칭이지 「교황성하님」, 「각하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님」은 이름이나 명사 뒤에 붙여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이 접미사는 직접 그 사람을 앞에 두고 「선생님」하고 부르는 호격으로 쓰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의 사표(師表)」처럼 호격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다. 이렇게 「여」와 「님」이 다르듯이 「주여=주님」은 성립되지 않는다. 뉘앙스가 다르다. 의미가 다른 것이다. 이것을 규격에 맞추듯이 쓰는데 문제가 있다.
세세대대(世世代代)라는 말과 영원(永遠)히라는 말도 서로 다르다. 세(世)는 한 인간의 일생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종결하는 시점까지를 단위로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세세(世世)는 새롭게 시작하여 과거로 종결하는 인생의 연속이다. 대(代)는 인생의 윗 선조를 역(逆)으로 한 세대(generation)씩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대대(代代)는 여러 대가 거듭됨을 말한다. 역대, 선조대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세대는 단절적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연면(連綿)하게 이어진다는 데에서 세세대대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영원(永遠)히라는 말은 단순히 추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일컫는 것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의미한다. 대나무가 한 매듭 한 매듭으로 이어져 커가듯이 운명과 역사, 과오와 회심이 세대로 이어지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코 「세세대대가 영원히」는 아닌 것이다. 이것을 혼동해서야 되겠는가? 언어에는 실로 형형색색의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언어(용어)를 손질(수정)할 때는 우선 그 언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후 언어의 실제(實際)를 고찰해야 한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세계에는 비약(飛躍)이 없기 때문이다. 모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모교수가 존재(存在)를 「있슴」이라고 했다. 그러면 존재론과 「있슴론」이 같다는 말인가?
한글어는 본래 감각어이고 설명어이다. 따라서 있슴이란 말은 감각적이고 설명적이 개념이다. 반면 존재라는 말은 존(存)의 생명체 개념과 재(在)의 공간위치적 개념을 포괄한 것이다. 우리는 생명체 개념이 두드러질 때 재망(在亡)이라 하지 않고 존망(存亡)이라 하고, 생재(生在)라 하지 않고 생존(生存)이라 한다. 또 공간위치적 개념이 두드러질 때는 재택근무자(在宅勤務者)라 하지 존택근무자(存宅勤務者)라고 하지 않는다. 소재(所在)와 소존(所存)은 다르지 않는다. 이런 의미를 포괄한 것이 존재라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있슴은 존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말은 될 수 있으나 더욱 깊은 의미로 볼 때 양자를 등식화할 수는 없다. 좥존재=있슴좦이라는 등식은 대단히 피상적인 인식에 의해 나온 등식이 된다. 우주라는 말도 똑같은 집 우, 집 주이지만 우(宇)는 공간개념이고 주(宙)는 시간개념이다. 따라서 우주라는 말 속에는 시공을 합한 전체로서의 세계가 포함된다. 거기에는 발생과 형성이 있고, 운명이 있으며, 자연과 문화가 함께 있다. 거시(巨視)부터 미시(微視)까지 가시(可視)부터 불가시(不可視)까지를 포괄한다. 그래서 우주(cosmos)라 했던 것이다.
좋은 말은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고해(告解)와 고백(告白)이 다르듯이 비슷한 말과 정확한 말은 다르다. 말의 미묘한 의미 차이나 느낌을 무시하는 언어는 개오(改惡)이며 타락이 됨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용어를 정리하고 전례문을 손질할 때 아무리 주의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교회용어를 확정한다는 말과 전례문을 개정한다는 말은 차이가 있다. 교회용어를 확정한다는 것은 용어의 애매모호한 개념을 확실하게 한다는 뜻이고, 전례문을 개정한다는 것은 전례의 본질과 의미의 동일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그 표현양식을 시류(時流)감각에 맞추자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애매모호가 새로운 애매모호를 만들어서는 혼란과 타락을 유발할 뿐이다.
요컨대 전례는 가장 감동적인 시(詩)적 표현으로 우리의 종교적 정서에 일치해야 한다. 무언가 호흡이 안 맞고 때로는 김빠지게 되는 일상적인 체험을 적응과 습관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새롭게 바뀐 전례문을 2년 반이 넘게 시행(施行)해 보았으니 이제 재검토(再檢討)해 볼 기회도 된 것 같다. 또한 앞으로는 전례집전자, 국어학자와 함께 영성가와 시인, 음악가도 교회용어 개정 작업에 참여함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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