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괜시리 마음만 바빴다. 아직 깨지않은 잠을 떨치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아이들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우리 보다 두어시간은 더 일찍 일어났을 아내의 손놀림이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 오늘은 1년 365일 중에 너희들을 위해 아주 마음먹고 「봉사」하는 날이다. 이까짓 고생쯤이야 식은 죽먹기지』라며 다짐을 해 보지만 웬지 피곤할 것 같은 하루에 대한 염려를 뒤로 하고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발길이 끄는대로 따라나섰다.
제1코스는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공원. 학습과 놀이를 겸할 수 있어 「일석이조」「일거양득」이라며 아이들을 설득해놓은 상태였지만, 정작 아이들이 가고싶어 했던 놀이동산만큼은 교통체증에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한 숨막힘을 피해보고 싶은 간절한 속내였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이날이냐 어딜가나 장날 아닌 곳이 있었겠는가마는). 오전 10시를 넘어서자 이미 공원은 사람들로 만원이 되어간다. 평소 5분이면 탈 수 있는 가족열차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세겹 네겹 줄을 서 20여분을 기다려서야 겨우 탈 수 있었다. 과학관을 비롯해 각종 학습 탐구시설이 있는 본관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로봇의 안내멘트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도 누구 하나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나무라지 않는다. 어린이 날이니까.
탈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아이들을 따라다니길 1시간여. 등줄기가 땀으로 흥건해질 무렵 아이들을 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른 아빠의 표정 무언가가 아이들에게 위압감을 주었으리라.
오후 이른 시각, 서둘러 공원을 빠져 나오는데 건너편 패스트 푸드점에 가자고 졸라댄다.
『그래 오늘은 어린이 날인데』
앉을 자리는 아예 찾을 엄두도 못내고 가져갈 음식만 받아 나오는데 30여분이 걸린다. 아마도 그 집 사장 『장사가 늘 오늘만 같아라』고 외칠 것 같았다.
어린이 날 특수(特需)를 실감한 건 백화점에서다. 온갖 핑계를 대며 아이들을 집에까지 모셔다 놓고 첫째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게임 CD를 사러 백화점엘 갔다. 완구 및 어린이용품 매장 앞에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매장을 꽉 채운 사람들도 그러했지만 부모님들 지갑이 망설임없이 열리는 모습에 더욱 놀랐다.
몇만원 하는 조립용 로봇이나 여아(女兒)용 장난감은 오히려 싼편이었다. 이날 아마도 가장 인기를 끈 상품은 원격 조정이 가능한 로봇과 자동차. 마음먹고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 앞에서 부모들의 지갑은 맥없이 열리고 있었다. 한 대당 가격이 작게는 십수만원에서 비싼 것은 기십만원을 호가했다. 8900원 하는(그것도 할인해서) 게임 CD를 사주겠다며 큰소리치던 내 모습이 잠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내가 사는 부평엔 얼마전 대우자동차 공장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이 많다. 내 친구 중에도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아버지를 둔 애들이 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기 전까지는 명랑했지만 이제 말을 잃은 모습으로 변했다. 엄마와 아빠가 밤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 동생과 둘이 지낼 때가 많다고 한다』
국내 한 일간지가 어린이 날을 맞아 마련한 「열린마당」에 올라온 글 중 한 대목이다. 연휴를 맞은 지난 주말,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만 20만명, 용인 에버랜드는 10만명의 일일 입장객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어린이 날이니까 놀이공원에도 가고, 선물도 사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 날」의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한번쯤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일 수 있고, 그 고통을 나눌 때 이 세상은 더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는 것도 어린이 날이 주는 값진 선물이지 않을까.
일년을 기다려온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날, 혹 얄팍한 상술에 이용당하는 그런 어린이 날로 전락하는데 나 역시 일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루 온종일 찜찜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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