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살았던 어린 시절에 때때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집집마다 많이 먹을 수 있었던 설날은 늘 기다려지던 시간이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길게 뽑은 가래떡과 콩고물이 묻은 인절미를 만들어 동네에 돌리는 일이었다. 접시가 나뉘어지고, 접시마다 갈 곳이 정해지면 우리 형제들은 이날 떡 배달부가 되어 주교님댁, 신부님댁, 수녀님댁, 그리고는 동네의 어른들 집부터 하나씩 배달이 시작된다. 처음엔 어린 마음에 떡이 줄어드는걸 보면서 은근히 걱정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배달을 다녀오고 나서 내 생각이 기우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집 방바닥에도 동네의 여기 저기서 배달된 떡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것은 어려워서 떡을 하지 못했던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에도 우리집과 비슷한 양만큼의 떡이 배달이 되어 있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설날은 세배로 서로를 존경하는 날이고, 덕담으로 서로에게 축복을 베푸는 날이며, 나눔으로 소외와 배고픔이 없는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꿈꾸던 그런 복음의 삶을 실현하는 날이며, 우리가 준비하는 대희년의 삶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설날은 한낱 가장 긴 연휴쯤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심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어른이 소외되고, 내가족 이기주의로 고통 속에 외면 당하는 이웃들이 소외되고, 우리 민족의 명절정신은 실종된 그런 허울만의 설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부터 설 연휴가 시작된다. 올 설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욱 힘든 그런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런 때가 대희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시간이다. 세상 속에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 고통받는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슬기로운 신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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