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호남교구 소속인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는 대구대교구에서 맡아야 되겠어.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던 날 저녁의 어느 조촐한 식사 자리에서였다. 그 때에는 그저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평화적 정권교체의 실현에 감격한 나머지 별 생각 없이 불쑥 내뱉은 말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즈음 어떤 강의시간에많은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제들은 언제나 들(광야)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의 청와대 입성에 큰 힘을 보탰다 하더라도 그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들어가서 전리품을 나눌 게 아니라 대문 앞에서 뒤돌아 다시 들로 나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대통령이 벌써 임기의 반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 집권 초기에 한 몸에 받았던 많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나 노벨상 수상 등 세계인의 박수갈채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곤두박질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요즈음은 호남에서도 김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빈부의 격차가 하늘과 땅인데다 서민들은 점점 먹고살기조차 어려워진다는 게 그 큰 이유다. 이 나라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예나 지금이나 당리당략, 사리사욕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인데 김대통령은 여태껏 그런 인물들을 감싸안고 국회 의석수의 과반수 미달만을 한탄하고 있다. 취임식장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호언장담하던 개혁은 다 어디로 갔나.
이런 불만들의 근원을 짚어 올라가보면 거기 반개혁적인 수구 언론들의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또 다른 곳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시대에 권력 집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저함 없이 비판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참된 의미의 재야(在野)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지난 여러 해 동안 선거 때마다, 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체제에 합류하거나 영입되어서 들엔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게 문제다. 국민의 정부는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던 체제밖의 학생 시민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으려던 역대의 여느 정권들과는 달라야 한다. 재야를 인정하되 그들에게 매사에 내 손 들어주는 들러리 역할을 바라지 말고 섭섭하고 껄끄럽겠지만 순수한 비판세력으로 꿋꿋하게 들에 남아 있기를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이른바 NGO를 지원,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파이프라인을 설치해서 끝내 내 편을 만들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와해시키려는 못된 장난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야당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당이란 모두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인 이익집단인데다가 현 야당은 내가 말하는 들의 이미지와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진짜 재야는 우리나라는 물론 김대통령에게도 사사건건 발목이나 잡고 늘어지는 화근덩어리가 아니라 복덩어리이며 힘이다.
이제 우리 교회 이야기로 돌아오자. 우리 교회에 재야는 있는가? 교회 당국자들에게 재야는 필요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서 교회는 권력이나 이익집단이 아닌데 재야가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런가? 대답은 분명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지만 사람들의 공동체인 까닭에 간혹 하느님의 뜻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거나 알게 모르게 실수를 하거나 심하게는 속임수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쩌랴.
재야의 역할은 누구의 몫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단연 으뜸이 교회언론이다. 가톨릭신문, 평화신문과 방송 등이 그것인데 이들이야말로 진실보도, 여론수렴, 논평,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려면, 그래서 진정 교회에 봉사하려면 사주(社主)인 교회재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광야(마르1,3-4)에 서야 한다. 이런 바람이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진대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까지 이들에게서 교회기관이나 성직자들이 잘했다, 자랑스럽다는 기사는 봤어도 잘못했다, 시정하라는 글은 보지 못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교구마다 신학교가 세워져도 축복식 사진만 요란할 뿐, 신자들의 찬,반 여론은 없고 정양모 신부가 서강대학에서 성공회대학으로 슬그머니 적을 옮겨도 아는지 모르는지 일언반구도 없다.
교회신문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의 당보가 아니다. 국가가 사주인 KBS도 그렇게는 안한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 교회의 정의(定義)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회 각 층에서 언론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높아진지 오래다. 시민단체들은 언론사들을 세무조사하라고 난리다. 교회언론들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을 본받으라고 주문한다면 주제넘은 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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