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나 하러 가자고 해서 식당으로 갔다. 7월달이었기에 날씨가 무척 더웠다. 식사 중에 그 사람은 너무나 더워서 자켓을 벗어놓고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슬그머니 살펴보았더니 왼쪽 팔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제 이 사람이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식사만 하고 서로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내가 먼저 결혼을 하자고 말을 했다. 인연이 되려니깐 쉽게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10만원에 2만원씩 내는 월세방을 얻어 놓았다. 남편도 나도 부모님이 안계셔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께 결혼서약을 부탁드렸다. 결혼식은 돈이 없어 할 수가 없어서 교인들 몇 분을 모시고 목사님께서 해 주셨다.
그리고 한달 후에 임신을 했다. 그때도 나는 계속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결혼을 하자 남편은 서울로 아주 올라오게 되었다. 남편은 실업자가 된 것이다. 기술도 없고 정상인도 아니고 또 나이도 그 당시 36세나 되어서 취직은 불가능했다. 내몸은 점점 힘들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척추장애인이라 키가 120㎝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가 없게 되자 일감을 가져다가 남편과 같이 일을 했다.
쌀 살 돈도 없어서 아이를 가지고도 국수를 먹고 살아야 했다. 배추도 사지 못하고 우거지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 먹었다. 아이를 갖자 먹고 싶은 것도 참 많았지만 늘 참아야 했다. 이럴 때면 늘 기도를 드렸다. 우리 하느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라고 나는 분명히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마음은 편안하다.
나도 아기 엄마가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남편이 있기에 아기 엄마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비록 능력없는 남편이지만 나만을 위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고 사랑을 해주는 남편이 자랑스럽고 위대해 보였다.
그러던 중 임신 6개월이 되자 겁이 나고 두려웠다. 몸이 무거워지자 붓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일감을 가져다 하는 일을 중지해야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아기를 유산시켜야 엄마가 살 수 있다고 하셨다. 더 이상 아기가 자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내 몸이 너무 작아서 위험하다며 그냥 두면 아기도 엄마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