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교구 성산본당 강동금(베드로) 신부
“소외된 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신앙과 본당 사목활동에 자극·활력소 돼
72년 역량으로 교회 토착화 앞장서길
교회 비판 통해 교회 쇄신에 노력을
가톨릭신문 창간 72돌을 신문사 모든 가족과 함께 기뻐하며 이 날을 축하드린다. 1927년 4월 1일에 창간된 가톨릭신문이 72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제시대, 6.25동란 등 한국현대사의 숱한 시련을 거치며 오늘날 이처럼 성장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신문사 가족의 남모르는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올해는 특히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해의 창간기념이라는 점에서 가톨릭신문에게 의미가 깊을 것이다.
가톨릭신문과 나의 인연은 내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1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임 신부님을 뵈러 사제관에 갈 기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신부님께서 구독하시던 가톨릭신문을 열심히 보곤 했다. 그 시절 가톨릭신문은 교회소식을 낱낱이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통로였고 신앙생활에서 궁금한 점에 대한 대답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간 나는 신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파견나간 본당에서 어느 주일날 가톨릭신문 홍보팀이 왔을 때 정기구독신청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 보고 있다. 본당신부로 있으면 그렇게 가끔씩 신문사에서 홍보를 다녀가는데 그 때마다 나는 『교회신문을 보는 것은 교회선생님을 가정에 모시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되도록 많은 교우들이 가톨릭신문을 구독하도록 권유했다. 얼마전 가정방문을 하면서 살펴보니 웬만큼 열심한 신자가정에서는 거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랬듯이 지금도 나는 가톨릭신문에서 본당사목에 관한 많은 것을 도움받고 있다. 세계교회의 흐름, 타교구겫뺨煐努? 모범적이고 우수한 선교겭潁?사례 등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은 나의 신앙과 사목활동에 자극을 주고 활력소가 된다. 또한 신부님들의 훌륭한 주일강론은 나의 강론에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나의 신앙생활과 사목의 안내자요 동반자인 가톨릭신문에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무언가 가톨릭신문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몇 말씀 드리고 싶다.
첫번째, 가톨릭신문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를 위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한국에 천주교회가 들어온지 200년이 넘었지만 가톨릭신앙은 아직도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을 토착화시키는 일은 세계교회에도 큰 공헌을 하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문이 앞장서서 이 어렵고 험난한 작업에 뛰어들었으면 한다. 72년간 쌓아올린 역량으로 꾸준히 노력할 때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교회의 선각자로 늘 앞장서왔던 가톨릭신문이 우리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두번째, 소박한 얘기인지는 몰라도 시골본당겙遍?등 소외된 지역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내가 시골본당 신부라서 그런지 온통 교회 소식은 도시 위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도시에 교우도, 취재거리도 많고, 교통도 좋겠지만 좀 힘들더라도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겙便올셀?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낮은 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정신이 가톨릭신문에서 구현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가톨릭신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몇 자 적어보았다. 창간 72돌을 맞은 가톨릭신문이 2000년대를 맞이하여 더욱 좋은 신문으로 발전하고 하느님과 모든 교우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 민족화해위원회 정마라아네 수녀
“건전한 비판의 눈으로 「일침」기대”
다양한 구성·기획물로 읽을거리 많아
일주일 내내 틈틈히 읽는 신문 되길
교회의 새 변화 위해 「사랑의 매」역할을
얼마전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사랑의 매」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체벌 문제로 교육계가 많은 진통을 겪고 선생님, 학생, 학부모 사이에 신뢰가 깨지고 심지어 법정문제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는데 선생님께 「사랑의 매」를 전달한 학부모들이 있다는 소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선생님께 「사랑의 매」를 전달한 학부모들이나 「사랑의 매」를 드는 선생님은 학생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못된 부분을 인식하고 고쳐가라는 마음을 가져 전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일 것이다.
교회와 함께 호흡하며 일흔 두 해를 맞이하는 가톨릭신문에 「사랑의 매」를 선물로 드린다. 교회의 모습이 아픔을 통해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의 매」를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건전한 비판의 눈으로 필요한 부분에 일침을 가하고 함께 기뻐하고 칭찬해 주어야 할 것들은 더욱 풍성히 나누어 주었으면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 보시기에 좋고 아름답게 엮어가는 모습 뿐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모습까지도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눌 수 있는 열리고 겸손한 마음과 용기를 간직하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사랑의 매를 드리지만 다른 학부모들은 가톨릭신문이 사랑의 매를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제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면 학부모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릇된 길로 가는 학생들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가 인간의 것이 아닌 하느님?것임을 늘 잊지 않는다면 언론사도직에 있는 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잘 가르치는 것만으로 훌륭한 선생님이라 할 수 없듯이 비판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언론이라 할 수 없다. 교계제도 안에서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 역시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악이 선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무엇이 두려운가. 주님께서 「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있겠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하나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좀 더 다양한 구성과 기획물로 읽을 거리가 많은 신문을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신문에 나오는 기자분들 이름을 보니 아주 적은 인력으로 신문을 만드는 것 같아 힘들 줄로 예상된다. 너무 큰 욕심이고 무리한 부탁일지는 몰라도 단 몇 시간, 몇 분 읽고 버리는 신문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옆에 두고 틈틈히 읽을 수 있는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신문을 받아들면 「이번 주에는 어떤 기사가 있을까」하고 기대하게 되고 신문이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그런 신문 말이다.
가톨릭신문을 사랑하는 마음에 나 역시 지금 가톨릭신문에 「사랑의 매」를 들었다. 사실 나는 가톨릭신문을 사랑하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대희년 맞이 특별기획」을 통해 각 교구에서 구체적으로 대희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해 나가는지 함께 나눌 수 있고, 전례시기를 보다 뜻깊게 준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지상 중계를 통해 특강을 전달해 주는 것 등 모두 가톨릭신문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창립 일흔 두 해를 맞는 가톨릭 신문사 가족 모두에게 축하의 마음을 드리며 하느님께서 앞날을 환히 비춰주시길 기원해 본다.
◆ 한국일보 상임 고문 정달영(크란치스코)
“「고급지 지향·변화」를 제안한다”
「공론 마당」등 「의제설정」기능 강화해야
면별 특성화 기사 계열화에 좀 더 노력을
잘못된 일에 대한 과감한 문제제기 논의 필요
「교회내 매체」로서「자족」으로 끝나서는 안돼
가톨릭신문 창간 기념일을 축하하기에 앞서, 72주년이나 되는 그 연륜에 놀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종합지로서 나이가 제일 많음을 자랑하는 두 일간신문의 역사에도 거의 육박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경의를 보낸다.
세상에는 수많은 인쵀매체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성격과 목표가 분명한 것만은 아니다. 영향력이 큰 종합지들 가운데도 정체성과 혼란을 겪거나 독자층 설정 조차 애매한 경우가 흔하다.
가톨릭신문은 비록 제한된 수요층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성격과 목표가 분명한 신문일 수 있는 독특한 신문이라 할 수 있다.
참고하자면, 종합지라고 하는 대중지들은 기사를 쓸 때 독자의 평균적인 수준, 또는 좀 더 낮은 수준을 상정(想定)하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학력에 사회경력 10년」이거나 「중졸 플러스 10년」식의 금을 긋고,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쉬운 문장쓰기를 강조하는 뜻이지만 대량보급만이 지선(至善)인 대중이로서의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한 것이다.
가톨릭신문이 세상의 대중지들과 같을 까닭은 없다. 그렇다고 대단한 고급지로의 변화를 주문할 게제도 못된다. 그러나 권하고 싶은 첫번째 모습은 역시 「고급지 지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물론 서구의 몇몇 고급지 수준을 말하는 제안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수준보다 한 단계, 또는 반 발짝씩 눈높이를 올리고 앞서가려는 노력」을 하자는 뜻이다. 「고급화」나 「좀더 세련되게」가 더 알맞는 표현일런지 모른다. 가톨릭신문이 지닌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만으로도 이런 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고급지란 대체로 지면의 디자인, 구성, 의제설정, 기사를 다루는 방법 등에서 「점잖은 매력」이 발산되고 기사와 논설과 칼럼 등에 「지성적인 문체」가 드러나는 것이 그 요건이라고 정의된다. 「점잖은 매력」과 「지성적인 문체」는 쉽게 성취될 일이 아니지만 지향은 그곳에 두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할 일은 아니다.
두번째는 「의제설정」기능의 강화다. 신문은 정보와 소식을 전달하는데서 그 기능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론(公論)의 마당을 열어주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더맡아야 한다. 우리 사회를 「하느님의 눈으로」바라보고 논의해야 할 일 등이 너무나 많다. 그때 그때 제기되는 사건들, 국제화 정세 등, 특히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온 여러 반(反)생명 현상 등에 대해 신앙인들의 생각을 도와주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하다.
또한 교회 동동체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거나 어려움을 안겨주는 문제들, 어딘가 잘못 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과감한 문제제기와 논의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매주 주제 하나씩을 내건 큰 마당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번째는 지면의 정리기술에 관한 것이다.
면별 특성화, 기사의 계열화를 위해 좀 더 노력하면 「종합」문패가 붙은 면을 지금보다는 줄여 갈 수 있을 것이다. 각 교구에서 나오는 잡다한 소식도 제목 앞에 컷을 사용해서 나타내는 표시를 하거나 기사배열을 교구별로 구획을 지어, 좀 더 정제된 지면을 구성해야 한다. 현재의 방식은 너무 어수선하다.
200자 원고지로 4매쯤 되는 짧되 감칠맛 나는 가톨릭신문 간판, 만평, 칼럼이 있으면 좋겠다던가, 새 책의 내용이나 잡지에 실린 좋은 글을 소개하는 다이제스트 기능, 교구간 대화와 교류를 위한 기획, 회장 열전(列傳), 인권과 여성과 성초년을 위한 과감한 지면 개방 등 요청하고 싶은 기획은 많이 있다.
그러나 마침내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하나 남아 있음을 털어 놓아야 하겠다. 가톨릭 신문은「교회내 매체」로서 시종하고 자족하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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