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여름에는 강원도의 씨랜드 화재로 유치원 아이들이 수십명 불타 죽었다. 가을에는 미성년자 상대로 불법영업을 하던 인천 호프집에서 10대 청소년 50여 명이 잿더미가 되었다. 겨울에는? 이번에는 망년회다 뭐다 해서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어른들이 떼죽음 당할 차례가 아닐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성수대교 댕강, 삼풍백화점 폭싹, 지하철 공사장의 도시가스 펑펑, 그리고 가련한 목숨들을 통닭구이 하듯이 저 세상에 무더기로 송출하는 이 나라는 도대체가 어떻게 된 나라 인가?
금년 말까지 중앙과 지방의 정부가 진 채무는 112조 원. 국내총생산의 23퍼센트로 IMF 위기 때보다 두 배로 증가한 것이다. 2년 동안 빚잔치를 계속한 것이다. 게다가 외국에 진 빚은 1500 억 달러가 넘는다. 이자로만 매년 백억 달러 가량 나가야 된다니, 원금은 언제 갚을 것인가? 원금을 매년 백억 달러씩 갚아도 15년이 걸린다. 무역 흑자라도 매년 2~3백억 달러가 된다면 우물쭈물 주먹구구로라도 꾸려나가겠지만, 국제경쟁력이 강화될 전망이 어두우니,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경제가 회복된다는 뉴스가 총선을 앞두고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저것 차분하게 따져보면 낙관보다는 비관이 앞선다. 이런 판인데도, 국제투명성기구가 99개국의 부패지수를 보면, 우리 나라가 50등이다. 한국 공직자의 부패지수가 96년의 부패지수 5.02에서 99년에는 3.8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만큼 급속도로 부패했다는 말이다. 뇌물제공지수는 주요수출국 19개국 가운데 꼴찌가 중국이고 그 다음이 우리 나라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학입시, 특히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몸살이 나는, 정신질환에 가까운 만성 전염병에 걸려 있는 동안에, 진짜 학교 교육은 짹소리도 한마디 못한 채 말라죽고 말았다. 지난 5월부터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국제사회의 흐름에 관한 특강을 했는데, 일선 교장과 교사들의 입에서는 이구동성으로 한탄과 한숨만 나왔다. 우리 나라에 교육은 없다고. 도와주기는커녕 사사건건 간섭만 하는 교육부를 차라리 없앴으면 좋겠다고. 자율이란 허망한 구호에 불과하다고. 국가정책을 다루는 여러 기관에서는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 그리고 새 천년에 초일류 국가로 도약 한다는 장미빛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이 아시아 아니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고 한다. 구구 절절이 그럴듯한 말로 가득 차 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청사진이니, 오죽이나 멋있겠는가!
그러나 그와 비슷한 청사진을 우리는 과거 40년 동안 얼마나 자주 보아 왔던가! 유신독재 시절에도 1990년대의 선진 한국이라는 책이 발간된 적이 있지 않은가?
초일류 국가는 고사하고, 일류국가도 고사하고, 중진국이나마 「제대로 된」 중진국, 부정부패, 먹이 사슬과 유착, 도청, 감청, 정치보복, 표적수사, 정실인사, 지역주의 따위의 지저분한 말이 사라지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중진국으로라도 만들어 준다면, 우리가 위정자들에게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중심국가가 된다니? 한국이 중심국가가 되면, 일본이나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가들은 변두리 국가 로 전락한다는 말인가? 제발 중심국가가 안 되어도 좋으니까, 공연히 멀쩡한 백성들에게 헛물켜게 하지 말고, 땀을 흘려 일한 만큼 정당한 보수나 받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불로소득으로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을, 눈감고 아옹하는 식의 사정이 아니라, 진짜로 청소를 해준다면 어느 누가 욕을 하겠는가?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이 수만 명씩이나 피를 흘리고 죽은 이 땅.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 제자들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 합쳐서 1200만 명 즉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나 된다. 그렇다면, 99개국 가운데 부패지수가 50등(후진국과 같은 낙제점)인 우리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만 썩었다는 말인가? 비율로 따진다면,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과 부유층 가운데 신자들이 오히려 더 많지 않을까?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당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는 신자라고 고개를 빳빳 하게 들지만, 사회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비신자와 다름없이 부패를 일삼는 위선자들이 아닌가? 화해와 용서, 정의와 사랑, 내 탓이오! 라고 외치는 것은 좋다. 위정자와 성직자들을 위해서 바치는 신자 들의 기도도 눈물겹도록 갸륵하다. 그러나 각자의 가슴 속에서 진정한 뉘우침과 속죄의 행동이 증발해 버린 채, 입술로만 나불대는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낡은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과 같은 로봇의 기도 가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정말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바보 또는 천치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방이 캄캄할 뿐이다. 새 천년이 와도, 여전히 우리 손으로 만든 떼죽음과 부조리와 불의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하고, 눈물의 골짜기를 방황하다가 금쪽 같은 세월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 이래서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권력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와 성직자와 신자들이 가난의 좧정신좩이나 한가하게 강조하지 말고, 먼저 문자 그대로 가난과 자선 을 실천에 옮겨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각계 각층에서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정신환경 보호운동」 을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이제는 말로만 소리칠 때가 아니다. 사회의 암흑이 숨막히도록 너무 진하다. 행동할 때가 왔다. 열 명의 정의로운 사람만이라도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줄 때, 새 천년의 해가 비로소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이규정, 정병조 신부, 정달영, 이동진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손희송 신부, 유경환, 김현옥 수녀, 문용린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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