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캄캄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클린터 미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일 것이다. 지난 1년 내내 그녀는 남편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졌던 '르윈스키 망령'에 시달려왔고 마침내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불명예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스컴은 남편의 섹스 스캔들을 불어댔고 그 내용들이란 포르노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저질스럽고, 지겹고, 구역질 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의 세월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
이런 경우 이혼 좋아하는 미국 풍토에서 힐러리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결별을 선언하고 백악관을 떠나버렸거나 참을 수 없는 모욕의 세월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질 않았다. 고작 피로한 표정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게 그녀의 감정을 드러낸 전부였다.
어떤 면에서 오히려 그녀는 르윈스키 성추문이 터지고 나서 더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모른다. 남편을 용서하고 가차없이 융단폭격을 해대는 언론과 의회의 공격 앞에서 하원 표결장에까지 나타나 남편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정말 순종을 미덕으로 하는 동양여인에게서 조차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무너져내리는 백악관의 권위를 위해 장애인 초청 등 인간애를 나누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고 허리케인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중남미로 날아가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인들은 한동안 그녀에게 가졌던 나쁜 이미지-치맛바람.냉혈인간.권력지향-등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30대보다 50대에 더 아름다운 여성'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위기와 고통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존경심까지 얻고 있다.
그래서 지난 연말 저명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해마다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로 힐러리 여사가 유력하게 거론되다 마지막에 탈락했다. 역시 클린턴의 탄핵결정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힐러리에게 아쉬움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정말 인간은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고통에 처했을 때, 그리고 위기에 처했을 때, 인간으로서의 품위, 그 자존심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고통과 위기에 처했을때 인간으로서 품위 지켜야
나는 3.1독립운동을 일으켰던 민족 대표 33인 중 끝까지 일본의 회유와 압력을 물리친 사람은 한용운선생 한 분 뿐이고 모두 민족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저버렸다는 말을 들으면 몹시 서글퍼짐을 금할 수 없다. 지난 해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회의로 정권이 바뀌고 나서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들이 철새처럼 당적을 옮겨 다니는 현실을 봐도 그렇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의 발목을 절단하는 막다른 세상, 또 그 보험금 때문에 자식의 손가락마저 자른 아버지, 정말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의 품위를 포기한 것에 분노를 느낀다.
수업시간에 체벌문제로 선생님을 112에 신고한 제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수업중에 선생님을 연행해간 경찰,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나라 꼴인가? 사실 '경제적 위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붕괴에 의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손상'의 위기다. 노벨문학상으로 빛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물질적.육체적 파멸은 감수할 수 있으나 정신적 붕괴는 거부하는데서 불후의 명작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참 평화'를 느끼자
헤밍웨이는 그것을 고기잡이에 나선 늙은 어부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노인은 바다에서 낚은 대어를 물어 뜯는 상어떼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움을 벌이면서 말한다. '너희는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순 없다'고. 이것은 정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거룩함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감동때문에 성서 다음으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좋아한다. 거기에서 나는 인간의 품위와 모든 것을 용서하는데서 오는 평화-그 참평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2천년 대희년을 앞두고 '거룩한 성부'의 해를 맞았다. 캄캄한 세월, 알게 모르게 저질러진 반인간적.비양심적인 일들, 남을 미워한 일들, 이런 것을 용서하고 털어버리자. 그래서 인간의 품위, 그 정신적 가치에 충실한 '성부의 해'가 되게 하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