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 중에 아주 괴짜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괴짜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꼭 자기 성질대로 살아간다니까, 한 번씩 만나면 곡차를 한 잔 거나하게 마시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눈다. 동양중 서양중하고 서로 놀리면서 20년 동안 수행하면서 살아온 백팔번뇌의 술판 속에 우리는 서로 엉켜 붙어 쓸쓸하면서도 그리운 삶 자체의 화두 속에 선(禪)을 발견하다.
흔들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한번은 아주 심각하게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 즉 가톨릭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지난 80년대에는 불교 신도들이 가톨릭으로 이사를 갔었는데 90년대 중반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불교로 마구 이사를 하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단학선원의 골수분자 중에 가톨릭 신자가 많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불교로 개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말을 꼭 해준다는 것이다. "당신의 말도 맞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없는 것은 불교에도 없습니다"
요사이 우리 신자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냉담자 보다도 열심한 신자들이 영성의 위기, 영성의 고갈 때문에 우왕좌왕하면서 갖가지 영적인 상품에 빠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젊은이들이 뉴에이지 메뉴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뉴에이지에 무슨 특별한 세균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많은 교우들이 토착화되지 않는 미사, 답답한 교리, 틀에 박힌 신심, 마음에 닿지 않는 기도, 어려운 강론, 우리 세시풍속에 맞지 않는 전례력 등 영성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마음과 몸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 신부생활을 18년이나 하였지만 늘 이게 아닌데 하고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타이타닉'처럼 서양종교의 침몰?
나는 친구 스님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원론적 일신론'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럴까? 이원론적 일신론이 그 원인일까? 그렇다면 일원론적 범신론에 빠지란 말인가? 내 생각에는 서양종교가 타이타닉처럼 장렬하게 혹은 초라하게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대한 빙산 때문이 아니라 이원론이라고 본다. 이원론은 여성과 남성, 종교와 정치, 구원사와 역사, 은총과 자연, 구원과 창조, 개인과 사회, 영혼과 육신, 사회복지와 사회정의, 종교와 과학, 신비주의와 예언, 예술과 삶, 이세와 내세, 영과 물질, 예술과 지식인, 하늘과 땅, 에로스와 영성을 분리시킨다. 한마디로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이다. 이원론은 성서적 전통이 아니다. 그 원인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 비성서적 철학의 막대한 영성을 받아서인데 스토아 철학과 그노시스 철학,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 철학과 같은 이원론이 그 예이다. 이원론은 죽은 이론이고 폐쇄회로이며 또 죽어 소멸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역사적 범죄인 중세의 마녀사냥도 이원론적 잣대에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우리 교회도 좌우 영성의 날개가 필요하다. 한쪽 날개로 날아갈 수 없다. 그것은 죄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타락 내지는 구원의 영성으로 발전한 우익영성과 삶의 경험을 축복으로 시작하여 창조 중심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좌익 영성이 이 두 날개이다. 그런데 이 우익영성이 살찐 소파처럼 비대하게 발전해 오면서 플라톤주의적 이원론이 심화되었고 창조영성을 왜곡하고 억압했다. 인간이 얼마나 죄많은 존재인가와 인간이 얼마나 거록한 존재인가를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죄의 잣대만 내세우다보니까 우리의 영성이 한없이 위축되고 심지어 얀세니즘까지 한국교회를 초기에 덮쳤다. 2000년을 앞두고 서구 그노시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리지 않으면 우리 교회도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죄인'인 동시에 '거룩함' 강조해야
내 이야기는 '축복하시는 창조주'와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통합하는 것이다. 배제하지 말자. 사실 교회도 1세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하면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열린 자연신학과 자연적 종교성을 자신의 창조신앙 안에 연결시켰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와 창조영성을 배척하지 않고 빠스카 신비의 구원영성의 관계를 모색해 왔음을 보여준다.
우선 창조영성을 표현하는 성가와 기도, 미사의 감사송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손상호 신부님의 미사곡이 누구에게나 감칠맛이 있는 것은 뒷부분에 악센트를 주는 서양의 리듬이 아니라 첫박자에 악센트를 주는 한국적 리듬이라는 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가톨릭 선교사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당신께 신은 문을 꽁꽁 쳐닫고 집안에만 틀여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 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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