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꼴찌를 위하여라는 가요가 유행된 적이 있었다. 곡도 좋았고 가사도 재미있어 젊은이들이 즐겨 불렀고 그 가수는 이 노래로 데뷔를 했다. 그런데 그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동기가 있었다고 한다. 취업에 필요한 고등학교 성적증명서를 떼러 출신 고등학교에 갔었다. 그랬더니 학교 서무과 여직원이 성적증명서를 떼주면서 비실비실 웃더라는 것이다.
"왜, 무엇이 잘못 됐습니까?"하고 물어도 여직원은 대답도 없이 동정어린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만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오는 버스 속에서 봉투에 든 성적증명서를 꺼내 보았다. 그 순간 그는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성적이 247명 중(정확한 숫자는 기억할 수 없지만) 247등 - 그러니까 완전히 꼴찌였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번도 자신의 성적을 볼 기회가 없었던 그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냉담 교우의 상처…
그리고 비로소 서무과 여직원이 동정어린 눈으로 자신을 왜 빤히 쳐다보며 웃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꼴찌의 성적표를 이 사회 어느 곳에다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여직원이 그렇게 웃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더 없이 비참해졌다. 그 길로 그는 해가 넘어갈 때까지 헤매었다. 그러는 동안 이상하게도 자신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애정이 생기는 걸 느꼈다. 1등을 하기보다 더 힘든 것이 꼴찌가 아닌가.
성적이 꼴찌일 뿐, 내 젊음이 꼴찌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가슴에 어떤 힘이 솟아났고 마침내 자신과 같은 꼴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꼴찌를 위하여'라는 노래가 탄생됐고 잘난 사람, 1등만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노래로 사랑을 받았다.
'96 미국 아틀랜타 올림픽때 당연히 1등이 갈채를 받아야 할텐데 거꾸로 꼴찌가 뜨거운 환호를 받은 사진이 있었다. 그것도 마라톤. 이미 123등이 트랙을 돌았고 시상대에서 팡파르가 울려 펴지는 가운데 월계관이 씌여지는 의식도 끝났다. 스타디움을 꽉 메운 관중들이 자리를 뜨려고 할 즈음 한 선수가 죽을 힘을 다하여 트랙에 나타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압둘 베사르와시키 선수였다. 그의 기록은 4시간 24분17초. 1등과 배가 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트랙을 달리는 이 꼴찌의 선수에게 관중들은 돌아서려던 발길들을 멈추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포기하지마 시요!" 관중들은 응원까지 보냈다. 이에 고무된 듯 압둘 베사르와시키 선수는 이를 악물고 골인점에 다달아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은 꼴찌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좥해냈다좦는 득의의 표정으로 가득찼다. 관중들은 일제히 이 꼴찌에게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냈다. 1등의 월계관을 쓴 선수보다 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이 뉴스를 보면서 압둘 베사르와시키 선수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 꼴찌에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의연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더 휼륭한 것은 바로 그 관중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들은 꼴찌에게 비웃거나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꼴찌를 외면않았다.
사마리아 여인도 샘물을
오히려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를 보냈고 기립박수를 보냈다. 내 가까이에 냉담자인 몇 사람이 있다. 한사람은 왜 성당엘 빠지느냐고 물었더니 '돈이 없으면' 성당 다니기도 힘들더라고 했다. 또 한사람은 사건에 말려들어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탄을 받은 후 냉담하기 시작했다. '돈이 없으면…' 신자로서의 대접도 못받는 상처, 자신의 잘못에 돌만 던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없었던 고독의 상처….
교회는 가난한 사람이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죄지은 사람이 용서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꼴찌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지 않고 1등에게만 갈채를 보내는 것인가?
꼴찌 짓밟는 '시장경제론'
교회에서 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처럼 머리에 기름 바르고, 금 가락지를 낀 사람들만이 아니라, 과부와 고아, 지체장애자, 사마리아 여인처럼 죄를 쓰고 사는 사람까지도 교회에 나오면 샘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요즘 좥시장경제원리좦가 모든 가치의 십계명처럼 유행이다. 경제에서는 그것이 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장원리가 교회에 파고들면 못난 사람, 꼴찌, 별볼일 없는 잡초는 죽으라는 이야기다. 그래서는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꼴찌도 살고 잡초도 꽃을 피우는 사회 - 그것이 복음정신이고 좥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좦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고 했다. 꼴찌를 위해 우리 모두 노래를 부르자. 힘겹게 운동장을 도는 꼴찌 이웃에게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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