좥악에서 구하소서좦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들의 절망적인 외침이다. 입안에 밥을 나르는 숫자보다 더 많이 입안에 늘 침을 바르고 있는 반복적인 말이면서도 한 순간도 이 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은 희망적인 말인지도 모른다. 절망에서 절망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오직 한길이라는 뜻에서 이 기도는 우리에게 위험한 어둠 속의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좥구하소서좦라는 이 강력한 호소의 대상은 오직 하나의 절대자다. 이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이 마지막 애원앞에 큰 빛으로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큰 구원이다.
그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보다 크고 광활한 세계로 넓혀가게 한다. 분명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의 힘으로 살아가는 힘을 건네받는 느낌이 우리의 가슴에 물결로 흘러가는 것이야 말로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우리의 생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때때로 그 균형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물동이의 물이 다 쏟아져 내린 것 같이 가슴이 공허해 오고 삶이 통째로 바닥이 난 것 같으며 영혼조차 자리를 비운 것 같은 빈털털이의 위기에 다다르면 철석같은 믿음도 한낱 먼지같이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인간이 왜 조잡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면 결국 어느 한가지 정신적 약속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변명하려 드는 것,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장의 카드로 혹은 비장의 은장도로 사용하는 변명이라는 무기는 자기 보호의 대치물인줄 알지만 결국 그 앞가림으로 내세운 무기에 스스로가 베이고 만다. 변명이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기 기만에 부닥치고 금방 들통나는 이유로 또다른 이유를 만들어 내고 겉으로는 당당한척 하면서 자기 열패감에 쌓이며 모든 생활이 찌그러들고 영혼까지 마침내 눈이 멀어지는 것. 자기를 가두는 감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시소게임같이 하나의 몸뚱이로 좌우 상하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눈부신 희망이 있다.
좥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다좦(요한15, 9)
그렇다. 신앙이란 눈부신 하느님에 대한 애착이다. 자기 내부의 빈 공간과 결핍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마지막 문에는 반드시 하느님이 계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분명 약속을 하신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거짓말을 하며 변명을 하며 가면을 수시로 사용해야 하는가. 정말 그렇다. 진심으로 기도안에서 확고한 증명서를 내 머리속에 각인시키고 싶은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받는 기쁨을 체험하는 것,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일은 인간이 갖는 최대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지혜야말로 신앙이며 축복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알고 나면 다른 것은 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받는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체험의 마지막이라는 것 그 체험을 찾아 머뭇거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래 지혜를 벌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안되면 지혜를 구걸하였다. 손에 쥐어지는 돈을 꾸는 것은 부끄러움이지만 머리를 빌리는 것은 보다 정신적인 수준의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지혜를 마치 금처럼 남의 금광속에서 캐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혜는 내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내것이 내안에 있으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장님으로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목말랐다.
내가 사랑받는 기쁨을 인식하는 순간 장님은 눈을 뜨고 지혜는 나의 금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순간 우리는 구원받지 않겠는가. 그 순간 지혜는 하늘에 닿으리라. 좥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힘이 솟아 나리라 날개쳐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좦(이사40)
하느님이 주신 이 원동력의 힘을 지혜로서 찾아 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찾아가는 길은 늘상 생략하고 부르기만 하면 손에 놓아주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우리들인지 모른다. 순도와 함량이 모두 미달인 가짜 신앙을 앞세워 축복의 월계관을 머리에 얹고 싶은 이 세상사의 모습, 수단과 방법이 거덜난 상황속에서의 인간싸움이 극도의 위기에 있는 도시. 가끔 바로 이 순간 하느님의 표정을 그려 볼 때가 있다. 과연 이 인간세상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하는 대상을 두고 말이다.
정호승의 시 좥서울의 예수좦에서는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 울고 있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인간의 세상에서 찬밥 한덩이 얻어 먹고 어둠속으로 걷고 있는 예수. 절망의 잔에 눈물을 마시는 예수. 잔혹한 인간의 무리가 검은 물결로 흐르는 서울에서 예수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붕괴와 파탄을 보는 일은 처절하지 않겠는가. 그는 찬밥 한덩이를 대접받으며 그들에게 고단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 힘을 주기 위해 지금도 울며 맨발로 세상사의 사금파리를 쓸고 계신 것이다.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들의 절망적인 외침을 오늘따라 더욱 처절히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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