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문턱으로 선뜻 다가섰다.
아침 저녁은 제법 선들거린다. 귀뚜라미 소리에 코스모스가 마구 흔들린다. 얼룩 하나 없이 쪽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출렁이는 초가을 들판은 우리에게 무한한 결실의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정녕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다. 알알이 여무는 벼 이삭처럼 우리네 마음도 영글어 가야겠다. 풍요로운 가을은 거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거두어들이는 가을은 씨 뿌리는 봄이 있고, 땀흘린 여름이 있고서야 가능하다. 일한 만큼 얻고, 일하지 않은 만큼 잃는다는 가을의 이치가 무섭도록 사무친다. 우리의 일상은 계절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 동안 헐뜯고 눈흘기고 욕하고 미워하느라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떠올리는 데엔 너무도 소홀했다. 저마다 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힘겹게 여기까지 쫓기듯이 달려왔다.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을 사유(思惟)하기엔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해 저무는 줄 모르고,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어느 고개까지 와 닿았는가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에 이르렀다.
아침이 빠르면 저녁도 빠르다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 사람 모습을 한 회색 도둑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사람들을 꾀어내어 은행에 시간을 맡기도록 시간 저축 운동을 벌인다. 사람들은 이들의 말대로 행복을 얻기 위해 1분 1초를 아껴 가며 일한다. 그리고 시간을 은행에 저축해 나간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가 시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아이들도 「장래를 위해서」 열심히 저축을 해나간다. 그리하여 자유스러운 시간들을 야금야금 빼앗긴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소녀 모모는 끝내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시간은 생활이다. 생활은 절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간을 절약하면 사람의 생활은 메마름 뿐이다』 이렇게 작가 엔데는 말한다. 우리는 1분 1초를 다투는 듯이 너무도 시간에 쫓겨가며 살고 있다. 현대문명은 몇 년이 지나도 1초도 틀리지 않는 그런 시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처럼 정확한 시계가 필요한 만큼 알뜰한 삶을 우리가 누리고 있다 할 수 있을까?
한때는 우리 나라에도 서머타임(일광 절약 시간)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서머타임으로 한 시간을 버는 것도 좋다. 그 한 시간을 요긴하게 쓸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침이 빠르면 그만큼 저녁도 빨리 온다.
더 쓰는 사람 덜 쓰는 사람
삶과 더불어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붙잡고 못 잡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리고 못 누리고의 다름이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누구나 똑같이 쓰지는 못한다. 더 쓰는 사람, 덜 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시냇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순간과 일생의 소중함을 안다면 시시각각 진행되는 1회의 삶을 함부로 살아갈 수는 없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불행 중 다행히도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고 노래했다. 이생(二生)이 아닌 일생(一生)이므로, 그 한 번을 사는 것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1회의 삶을 자각하는 인생만이 참으로 사는 것답게 살다 간다.
우리 나라 속담이나 속어에 「뒷북」에 관한 것이 꽤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그리고 흔히 쓰는 말로 「버스 지난 뒤에 손드는 격」 이라는 것도 있다. 이미 소용이 없어진 상황을 풍자하는 것이다. 들국화 청초히 피기 시작하는 사색의 계절이 저물기 전 「버스가 지나도 한참 지난 뒤에 손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묵상해 봄직하다.
유한 속에서 무한의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인간의 사유(思惟)는 눈부시다. 영원으로 열리는 순간은 한 번 스쳐가고 나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의 역설이다. 그 역설의 의미를 터득하는 인간만이 순간을 붙잡는다. 그리고 1회의 순간을 영원으로 이어 낸다. 아버지의 집을 향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선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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