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일자 동아일보에 기가 막힌 사진이 실렸다. 한 덩어리에 30만원인 무등산 수박이다. 보통 수박보다 4~5배 가량 크게 보였다. 서울의 강남에 위치한 갤러리아 백화점에 나오자마자 다 팔렸다고 한다. 10만원 이상 짜리도 부리나케 동이 났다는 기사에 촌스럽게도(!) 입이 딱 벌어졌다.
도대체 한달 수입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그런 수박을 겁도 없이 턱턱 사갈 수가 있는가? 그 사람들은 서민들과 달리 간이 수십 배는 크겠지. 그리고 그런 수박을 썩썩 썰어서 먹으면 천당에라도 간 듯이 대단히 행복하겠지. 그리고 그런 수박을 사간 젊은 어머니(남편이 그런 짓을 하겠는가?)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돈이란 이렇게 쓰는 거야!」 아니,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녀들은 돈이란 그렇게 마구 쓰는 것이라는 교훈을 부모의 행동으로부터 이미 뼈저리게 받고 자라고 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잔소리가 많아?』 그 말도 일리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다. 다 같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 사회다. 무등산 수박이 아무리 신선들이나 먹는 과일이라고 해도, 또 사가는 사람이 아무리 수백억원의 재산이 있다고 해도, 수박 한 덩어리에 30만원은 너무 심하다. 돈이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분명히 배웠다.
신문의 보도 태도
더 큰 문제는 신문의 보도 태도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면 그만인가? 그런 기사가 우리 사회에 무슨 이익을 주는가? 5백원 짜리 라면으로 한끼를 때우고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만명은 되는 우리 현실이다. 실업률이 특히 높은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 한 시간에 2천원도 못 받는다. 하루에 1만원, 한달에 30만원을 벌기가 힘든 현실이다. 월급쟁이도 한달에 백만원 미만이 수두룩하다. 실업자도 백만명이 넘는다. IMF이후 실직의 여파로 자살한 사람이 작년에 40%나 증가했다는 보도도 있다. 그런데 수박 한 덩어리에 30만원이라니! 누구를 약올릴 작정인가?
부자들이 그런 수박을 먹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보도하는 심보는 무엇인가? 이왕 보도를 하려면, 30만원 가운데 생산지의 농민에게 얼마가 돌아가는지, 그리고 무슨 근거로 30만원인지(무슨 물건이든 파는 쪽에서 멋대로 가격을 붙이는 것이 자유경쟁인가?), 유통과정에서 폭리를 취하는 사람은 없는지, 우리 나라의 농산물 유통구조에 근본적인 병폐가 무엇인지도 아울러서 보도했어야 올바른 보도 태도가 아니었던가?
밍크 옷 로비 사건
밍크 옷 로비 사건이 국회의 청문회까지 올라가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온 국민을 허탈감으로 몰아넣는 동안에도 주요 일간지에는 수백만원 짜리 모피 코트를 세일한다는 백화점의 전면 광고(마호가니 휘메일 반코트 540만원 등)가 계속 등장했다. 뇌물로 받은 돈이 아니라 정당하게 번 자기 돈을 내고 산다면, 수백만원이 아니라 수천만원 짜리 모피코트를 입는 것은 자유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경제가 발전했다는 증거도 된다. 그러나 밍크코트에 관해서 와글와글할 바에는 그 원료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고, 한벌에 드는 생산가가 정확하게 얼마고, 얼마의 세금이 국고로 들어가는지를 자부심과 양식이 있는 기자라면 자세하게 국민들에게 알렸어야 옳지 않았던가? 비싼 옷일수록 국고로 들어가는 세금이 그만큼 많을 것이니까 수천만원 짜리 옷을 입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불러도 좋지 않은가 이 말이다.
20억원 짜리 아파트가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건축원가는 얼마인지, 부당한 폭리는 없는지, 세금은 얼마인지, 탈세는 없는지, 그런 것들을 밝혀주는 것이 올바른 보도태도일 것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서 신문을 더 많이 팔아먹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면 곤란하다. 서민들의 약을 올리겠다는 저의는 없었다고 믿어주겠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고 해서 기자가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0만원 짜리 수박을 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가 아프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덩어리에 3천원 짜리 수박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한다. 20억원 짜리 아파트나 빌라 따위는 우리 가족에게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부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한 서민들의 모금이 매년 두배로 증가하고, 재벌들도 거액을 사회에 환원하는 반면, 우리는 남을 돕는데 너무 인색하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기는커녕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먹고 마시고 사치하는데는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서 간다.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더욱이 부끄러움조차 느낄 줄 모르는 철면피들의 사회는 또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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