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믿고 의지할 정신적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 지도자는 당파를 초월하고, 사적(私的) 이해(利害)를 초월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노릇을 못하고 있다. 가정에도 학교에도 사회에도 존경할 어른이 없어져 버렸다. 부모는 가족 이기주의의 선봉장일 뿐 가정교육을 포기한지 오래다. 학교에서는 사제 관계가 붕괴되는 마당이니 인성교육이 될 리 없다. 사회는 사회대로 무한 경쟁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모든 어른이 경쟁의 대상,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만 보이니 어른이 있을 수 없다.
이 어지럽고 혼탁한 사회를 정화시킬 어른이 없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칠 참 어른, 큰 어른이 없다.
아무리 국제 사회가 경쟁을 중시해도 나라 안에서조차 경쟁만 강조해서야 어찌 사람이 사람답게 살겠는가. 오늘처럼 살아서야 어찌 사랑과 인정, 질서와 의리가 유지되겠는가. 경쟁을 중시하는 국제 사회에 사랑과 인정, 질서와 의리가 있던가. 이렇게 인정도 의리도 없는 국제 사회의 풍속을 나라 안에서까지 확산시켜야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가정에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부모가, 학교에 학생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스승이, 사회에 온 국민들이 믿고 의지하며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과 같은 어른이 없다는 것이 이 시대 한국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어른들이 사적 이해에 얽매여 어른의 본분, 각자가 처해있는 위치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알아도 자신의 이해(利害)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나는 사범대학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주로 사범대 학생이다. 좬여러분이 부자되기를 바란다면 지금부터 벤처기업 같은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여러분이 권력을 좋아한다면 정치가가 되거나 법조계에 진출할 생각을 해야 한다. 여러분이 세속적 인기를 부러워한다면 배우나 탤런트, 가수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교육자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교육자는 돈도, 권력도, 세속적 인기와도 거리가 먼 직종, 오직 봉사하고 사랑하면서 청빈을 결심한 사람들이 택할 직종이다좭 이렇게 말하곤 하지만 청빈이 어찌 교육자에게만 요구되는 미덕이겠는가.
어른들이 도덕성을 상실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유가 물질적 욕심 때문이다. 참으로 촌스럽고 구닥다리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자기의 분수대로 살아야 한다. 분수를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데서 도덕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지도하고, 그 사회를 정신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면, 그 어른은 먼저 사리사욕에서 해방된 공평무사한 인격자라야 한다. 국가를 책임진 큰 어른, 정치지도자는 더욱 당리당략을 떠나 오로지 국리민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국민 앞에 털끝만큼의 속임수도 없이 투명해야 한다. 선거 앞에서도 흔들리면 안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할 일이 있다면 경제회복이 아니다. 수출고 증대도 아니다. 바로 청빈 정신에 의한 도덕성의 회복이다. 도덕성의 회복을 어린 사람, 젊은 사람들에게 요구할 것인가. 모든 어른들이 깨끗하게 살 때 도덕성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다운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고, 사악한 욕심에서 해방될 때 도덕성은 회복되는 것이다.
조선조 세종 29년(1447년)의 중시(重試)에서, 고려의 여러 가지 제도를 들면서 조선이 나라를 제대로 발전시키려면 어떤 제도가 가장 중요한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성삼문은 『제도개혁 보다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는 요지의 답을 써서 장원급제 했다.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신명을 바치는 것이다. 각자가 서있는 자리, 각자가 앉아있는 자리의 책임을 알고 사욕(私慾)을 채우는 것이 아닌, 최선의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공직자가 흔한가.
같은 중시에서 을과에 급제한 신숙주는 『제도 개혁보다 인재를 바로 등용해야 한다』는 요지의 답을 썼다. 우리 역대 정부는 인재 등용을 잘하고 있는가. 잘한다면 왜 고위 공직자의 낯뜨거운 부도덕성이 그렇게 자주 불거지는가.
또 중종 10년(1515년) 알성시(謁聖試)에 을과로 급제한 조광조는 『내(오아)가 부족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공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이런 요지의 답안을 작성했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기강과 법도가 바로 세워져 있는가. 제도 개혁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사람의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하면 안되고, 기강과 법도를 아무리 바로 세우려 해도 인재 등용이 잘못되면 안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 이끌고 갈 어른이 어른 노릇을 못해 생기는 일이다. 어른은 두려운 존재가 아닌, 믿고 의지하고 존경하는 존재이다. 어른이 없는 사회는 그래서 불행한 위에 불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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