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 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었다.
살아 있을 적에는 지위와 재물이 그들을 갈라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 곳에 나란히 누워 있다.
죽은 자들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나를 가르친다.
죽음을 통해서 더욱 생생해진 그들의 존재가 내 마음을 씻어 준다.
홀연히 나는 내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곧바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남하고 다투거나 그들을 비평할 필요가 무엇인가.
임옥당,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위령성월이다. 원래 그리스도인이란 삶과 죽음의 문제, 특히 죽음에 대하여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들이라고 봐도 좋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나들이 길 위에 있는 우리는 흔히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죽음을 어딘가에 가두어 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죽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고압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돌발 사건이지 평소에 늘 그것을 생각하게 되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삶과 죽음은 항상 짝을 이루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으며, 그것은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하고 매일 바치는 기도문에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이 시점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죽음과 대면하지 않는 한 삶을 모른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늘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죽음의 개념이 없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참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당신께 해주지 않은 것(마태 25, 42)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마땅히 해야할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평가를 받는 것이다.
반 나찌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마흔이라는 한창 나이에 처형당했던 독일의 알프레드 델프 신부가 남긴 글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다. 『만일 한 인간에 의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과 평화, 빛과 진실을 세상에 가져오게 할 수 있다면 그 일생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 나라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언니」의 짧았던 생애도 그 단적인 실례가 될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충실한 인생이란 양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질적인 문제임을 일러주고 있다. 일찍이 앨버트 슈바이처는 『남을 위해 바친 삶만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좥자기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에 더 많은 사랑을 가져오게 했는가, 자기가 하루하루 노력함으로 해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는가좦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죽음과 그 가능성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보다 깊은 사랑, 보다 깊은 사랑, 보다 정열적인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이들로부터 듣게 되는 공통된 고백 가운데 하나는 『생전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과 사건들, 늘 보아오던 산천초목 등 모든 것이 이처럼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다』는 때늦은 회한이다. 왜 마지막 날이 다른 날과 틀려야 하는가? 도미니코 성인이 요한 보스코 수도원에서 지낼 때의 일화가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하루는 도미니코가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서 『도미니코, 너는 이제 10분 후에 죽을텐데 이제 그 10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으냐?』하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계속 뛰어 놀래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 머리의 활동이 둔해지는 것, 그리고 모든 감각이나 기능의 결손이나 쇠퇴가 모두 죽음에 대한 준비이자 완만한 이행일 것이다.
늦가을 찬바람 속에 묻혀오는 연도(煉禱) 소리가 귓전을 울릴 때 두 자리 숫자인 내 나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우리들의 나이는 정당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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