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 대한 파병을 제기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인권국가」라고 자신있게 표현한 일이 있다. 선의로, 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인권국가가 되기를 지향하는 나라」로 해석하면 좋을 일이었다. 「인권국가」는, 그 근거가 박약하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표현과 지신감이 지나쳤다.
지난 주 유엔인권이사회는 우리나라 인권상황에 대한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근거한 모두 23개 항목에 달하는 내용이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국가보안법의 「단계적 폐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특히 제7조의 「찬양·고무」죄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규범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 부분은 실제로 국보법위반 구속자의 90% 이상이 이 「7조」를 어긴 것이고, 국민의 정부하에서 국보법위반 사범으로 구금된 400여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밖에도 유엔인권이사회는 준법서약제에 대해 「양심의 자유」를 제약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고, 판사 재임명제도 역시 개선이 시급하다고 권고했다.
유엔기구 등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이 우리의 인권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그중에도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지적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유엔인권협약을 90년에 비준한 터다. 「남북 대치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시민적 기본권리와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끊이지 않는 권고다. 그보다 앞서, 지난달 24일에는 집권당인 국민회의가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폐지」나 「단계적 폐지」는 아니고, 우선 「문제 조항」들을 손질하겠다는 취지다.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정면에서 끌어안고 풀어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라도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실은 작으나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적극적으로, 정면에서 끌어안고 풀어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보법에 국한한 얘기도 아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눈치를 살핀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지나간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 사회적 대의(大義)를 살려내는 문제에 있어서 국민의 정부는 마치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처럼 머뭇거린다는 것이다.
가령, 국보법을 개폐하겠다고 하면, 우리 사회 일각에선 반대론의 목소리가 증폭된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그대로 두고봐야 하느냐』, 『좌경 친북세력이 공공연히 날뛰고, 국민의 안보의식은 드디어 토붕와해(土崩瓦解)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마치 그것만이 진실인 것처럼 금세 일부 여론의 지지를 얻기도 한다. 역대 독재권력들이 「국가안보」 아닌 「권력안보」를 위한 국보법을 얼마나 악용해 왔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이나 비판세력을 탄압하고 제거하기 위해 어떻게 고문과 용공조작을 일삼았던지 하는 「악의 얼굴」은 하찮은 일로 치부되거나 논의 밖의 대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이며, 정부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보법을 개정하겠다니까 한쪽에서는 「색깔」을 들먹이고, 그걸 당하는 쪽에서는 「색깔」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언론대책 문건과 관련한 야당의 장외집회에서 전직 공안검사이고 안기부(당시 이름) 수사국장이던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지칭하며 「공산당 식」이라거나 「지리산 빨치산 수법」이라고 극언하는 사태야 말로 이같이 움츠러듦이 조장한 결과는 아닌지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 그같은 「색깔론」이 제기되기만 하면 「먹혀드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 까닭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뭉그적거리거나 냉소로 끝낼 일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는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유산과 그 과제를 두는데 과감할 필요가 있다. 「대의」에 관한 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다. 좌고우편하다가 실기하거나 기득권 수구세력에 발목잡혀 영달한 길로 갈 수는 없다. 지난 「잡지의 날」을 기해 전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 선생에게 서훈을 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그분의 죽음에 얽힌 「의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디 장선생 뿐인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의 숱한 「의문사」를 그대로 묻어둔 채 우리나라를 인권국가로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의 「의로운 죽음」, 「사회적인 죽음」을 「개죽음」이거나 「개인적인 죽음」 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피맺힌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유족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의 제정은 국보법 개폐논의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사안이다.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이기 이전에,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뜻에서 그러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