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야박스러운 주막 주인과 같다. 그는 나가는 손님에게는 가볍게 작별의 손을 흔든다. 그리고 들어오는 새 손님에겐 호들갑을 떨며 달려가서 악수를 청한다. 반길 때는 웃는 모습을 하고, 헤어질 때는 언제나 한숨을 쉰다』 몇 해전인가 셰익스피어의 생가(生家)를 방문했을 때, 그가 남긴 비망록에서 읽은 구절이다.
이제 1999년의 마지막 달이 소리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맘때면 누구나 지나쳐 온 한 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게 된다. 이를 데 없이 혼란스러웠던 한 해였다. 실로 엄청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 온 한해였다. 또한 일 년 내내 사회에선 아리송한 태도로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발언들이 난무하기도 하였다. 보람과 성취로 알차게 지난 한해를 짜 내려온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쓰라림과 괴로움, 뉘우침도 많았던 한 해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기를 무의미하게 비교해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남의 성공 사례는 위대하다고 보고, 자신의 성공은 보잘것 없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남의 실패는 하찮은 것으로 보고, 자기의 실패는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자신의 고통이나 실패는 자기 일생을 완전히 망칠 만큼 중대사로 받아들여, 한 번 실패하면 좥나 같은 존재가 감히 그런 일을 꿈꾸다니...좦하면서 자기 학대를 일삼는다. 우리가 얼마나 실패를 했건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실패를 겪을 수 있다. 또 우리가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 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당신이 물에 빠졌다고 반드시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후 가만히 있으면 익사하게 된다』 미국 정신력 개발의 권위자 지그 지글러의 말이다. 절망이 문제가 아니라 절망 상태에서 가지는 마음 자세가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절망할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 「사랑하지 않을 때」 이웃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엉뚱한 마음을 품을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허물어지고 만다. 목적지를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다. 어떤 핸디캡이 존재하더라도,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는 법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하루는 시작된다. 인생이 짧다하여 단거리 선수가 되지 아니하며, 괴로움의 날이 길다하여 우러러 볼 하늘을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 장애물 선수가 장애물을 탓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질서도, 역사의 질서도 우리에게 새벽이 없는 밤을 보여 준 일은 없다. 때로는 배경이 문제를 더 잘 밝혀주는 경우도 있다. 개나리는 3월 하늘을 배경으로 했을 때 그 참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들국화는 청자 빛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깔고서야 제격에 맞는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드러나게 하는 배경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무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이다. 신·망·애 삼덕(三德)의 바탕 위에서 영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만, 인간은 허상 속에 숨겨져 있던 그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프고 애달픈 인간사의 희로애락은 결국 십자가를 배경으로 했을 때만, 그 참된 의미를 밝혀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늘 우리가 느끼는 것이 세월의 덧없음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으로 심연에 빠져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약이 될 수 있다. 바둑을 둘 때 판세를 살피는 것은 계가(計家)로 통한다. 물론 계가는 바둑을 다 두고 나서 집을 헤아리는 일이다. 판에 놓여져 버린 바둑은 나의 바둑이라도 객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쌓여 온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바둑도 무를 수 없거늘 삶을 무를 수는 더욱 없다. 그렇다면 쌓여진 삶을 그대로 계가하고, 해마다 계가한다면 모자람은 채워져 가고 비뚤어짐은 바로 잡혀져 갈 것이 분명하다. 사제들에게 교회는 유서(遺書)를 미리 작성하여 둘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건강 상태나 살림살이의 변동 상황을 고려하여 매년 초에 그것을 갱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유서 갱신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지금 이 시간, 내가 눈을 감는다면 나의 묘비명은 어떻게 적혀져야 마땅할까 하는 점이다. 물론 묘비명을 남길만한 삶이 아니더라도 무방하다. 스스로 마음 속에 적어 보는 것마저 탓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삶의 계가를 보다 선명하게 압축하기 위해서 스스로 적어보는 묘비명은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옳고 그르건 간에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영국의 버나드 쇼도 그의 「생전 묘비명」을 남겼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스스로 적은 스스로의 묘비명에서도 그의 인품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독설과 자학이 번뜩이지 않는가.
하루의 해도 그저 저물어 버리기 위해서 저물지는 않는다. 새로운 빛으로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 해는 저문다. 하루의 태양이 지고 뜨는 뜻이 그렇게도 무겁다면 한 해의 낙조는 천근 만근의 무게와도 바꿀 수 없다. 새 천년을 준비하려고 지는 해는 더욱더 그렇다. 저무는 20세기의 황혼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솟아오르는 제삼천년기의 태양을 온 몸으로 맞이하자. 벅찬 삶의 짐, 삶의 십자가도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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