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종(鐘) 제작업소들은 요즘 밀려든 주문 때문에 즐거운 비명이라는 보도가 있다.
2000년을 맞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종을 치겠다는 행사가 많다는 뜻이다. 이른바 「밀레니엄 특수」다. 타종(打鐘)만이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아님은 물론이다. 나라마다 국가차원의 행사가 기획되고 기념비(紀念碑)와 같은 구조물들이 다투어 건립된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주도하는 준비위원회가 있어서,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계획되고 있다. 살펴보면 별의별 아이디어의 경연장이다. 새 천년의 첫 빛을 어디서 어떻게 받는가에서 무슨 무슨 열두 대문을 어디다 세우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행사가 연속된다. 밀레니엄 대사면도 별도로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IMF체제로 인한 경제사범을 포함한 경미한 행정법규 위반자, 과실범, 신용불량자, 공무원 교원 등의 징계기록, 운전면허 관련 벌점 및 면허재발급 등 수혜자가 무려 500만 명에 이르는 규모로 알려진다.
묵은 세기, 묵은 천년을 털어버리고 새 세기, 새 천년을 새로운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2000년 봄에 있을 총선을 굳이 연계시키는 생각은 불순한 억지에 불과할 것이다. 「묶인 이에게 해방을」 은 대희년의 정신이기도 하다. 풀어주고 탕감해주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2000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도록 요구받고 있는 이 시대의 당당한 이념이다. 문제는 밀레니엄, 혹은 대희년이라는 이름으로 남발되는 「거품」이요 「허세」다. 냉정하게 본다면 2000년도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시작되는 무수한 「새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21세기가 갑자기 시작되거나 새천년이 급격하게 도래하는 2000년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예비되어온 21세기와 새천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제 때에 시작되는 2000년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 3000년기를 맞이한다고 해서 근거없이 희망에 부풀거나 현실을 과장할 일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 세기와 한 천년기를 마지막 보내는 1999년을 옷로비 사건이며, 언론장악 문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로 목청 높이며 살았다.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새천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그야말로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고민은 안중에도 없이, 서로가 서로의 옷자락을 찢는 천박한 진흙탕 싸움으로 일관해 온 한 해였다. 외환위기는 벗어났다고 하나 찬바람 부는 거리에는 노숙자가 새로이 늘고 있다. 「중산층」 임을 자부하던 국민 대다수는 「20대 80」의 새로운 계층구조 안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했음을 자조하고 있다. 심각한 것은 전직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의 구속이 상징하는 이 사회 신뢰구조의 붕괴이며, 공(公) 사(私) 구분없이 연줄로 얽힌 공직자들의 기강해이 풍토다.
고위공직자 부인들의 철부지 같은 옷가게 나들이에 정신팔린 사이에 정작 잊혀진 채 넘어가는 「세기의 미제(未濟)」 현안들 중에는 인권에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 이근안은 잡았으나 「고문하는 구조」의 척결을 위한 진전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인권위원회를 법무부 산하 기관화하는 발상은 그대로 남았고, 국가보안법 개폐도 말만 앞섰지 실행 움직임은 아직 없다. 한가지 눈에 띄는, 반가운 보도는 국회에서 의원발의로 추진되는 「사형폐지특별법」 제정이다.
법안발의를 주도하고 있는 의원들은 『세계적으로도 105개국이 사형을 법률상, 또는 사실상 폐지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반(反)인도적 형벌인 사형을 폐지함으로써 새 세기와 새 천년에 인권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형법 등 모든 법률에서 사형을 없애고 무기징역을 법정최고형으로 하며, 경과조치로 현재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집행이 미뤄지고 있는 사람은 전원 무기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형제도는 무엇보다도 반(反)생명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不可逆) 행위라는 점에서 추방되는 것이 옳다. 교회를 떠나서, 유엔도 그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정치적 살인」이라거나 「법에 의한 살인」의 악폐는 우리나라에도 사례가 수두룩하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대사면이나 새 천년맞이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사업이 있다면, 아마도 이 사형폐지 특별법의 제정이 아닌가 한다.
의원발의로 제안되는 법이 통과되도록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지원해야 한다. 새 밀레니엄에 타종되는 종소리는 경축과 기쁨의 종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천년과 지나간 세기에 무디어진 인간양심을 일깨우는 경고의 종소리여야 한다. 우리가 맞이하려는 대희년의 기쁨도 우리들의 지나온 비뚤어진 삶, 우리들이 엮어온 오만방자한 사회에 대한 참담한 반성과 회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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