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천년에도 지구상의 인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를 죽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저지르며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불의 홍수를 자초했다. 그런데 그리스도 교회가 그러한 불의 홍수 속에 구원의 방주 역할을 했는지 한번 스스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하루라는 새로운 천년이 밝았다. 그러나 새즈믄해도 평화의 씨앗보다는 갈등의 씨를 더 많이 품고 있기에 희망보다는 회의가 앞서는 불안한 출발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구 위에서의 인간의 적정 숫자는 4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천 배가 넘는 60억의 인구가 새천년을 맞이하였으니 갈등과 대립이 없을 수 없다. 과연 인류는 60억의 사람들에게 그들 모두를 위한 삶의 공간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지구는 자신의 몸덩어리 위에 얼마만큼의 인간을 허용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버뎌낼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은 또 다른 새천년을 희망해도 될 것인가?
이러한 시점에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400만과 60억 사이에 놓여 있는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간극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일이다. 생물학적인 생활방식으로는 그 낭떠러지의 심연을 건너뛸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적자생존이니 자연도태니 하는 생물학적인 법칙을 적용한다면 소수의 강한자만 살아남고 대다수의 약한자는 죽든가 또는 인간이하의 동물과 같은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인간은 문화적 또는 문명적인 삶의 방식으로 슬기롭게 헤쳐 나왔다. 인간이 동물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차원을 넘어서 종교, 예술, 사상과 같은 문화적 차원을 엶으로써 인간은 생물학적인 자연지배의 법칙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배의 법칙으로 지구 위의 새로운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창조주만이 아는 비밀코드를 하나씩 해독해내었고 드디어 새로운 창조주임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술적 과학적 지배에 도취되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구촌의 모든 인간들이 세계화가 되어 이 지구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생각하며 똘똘 뭉친다면 기술공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과 과학에 양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간의 능력이 부족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넘쳐나는데 그 능력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는 데 파국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예전에는 인간은 자신들의 동물적인 욕구의 분출을 종교적인 믿음에 바탕하여 도덕적으로 처신하며 스스로 자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현금의 기술과 과학은 더 이상 도덕적인 덕목과 종교적인 금기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표시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종교와 도덕의 자리에 기술과 과학이 들어선 것이다. 칸트는 좬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니까좭 하며 인간의 능력 위에 도덕적인 당위를 설정해 놓았다. 그렇지만 현대의 과학에게 그러한 당위는 없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는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할 수 있으니까
과학에게 당위는 없고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죄악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죄악이다. 당위가 있다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것이 바로 과학에게 부과된 당위이다. 인간의 능력은 극대화 되었는데 반해 인간의 동물적 욕구를 통제하던 제도적 장치는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끝을 모르는 인간의 소유욕과 동물적인 욕정이 도덕감의 마비 속에 마땅히 추구되어야 할 쾌락으로 부추켜지고 있다. 생물학적인 인간이 기술과 과학의 힘만 믿고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될 때 과연 지구 위 인간들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것이며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과의 조화로운 공생이 가능하겠는가?
이토록 지구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든 종교가 다같이 합심해도 현대에서의 잃어버린 종교심, 세속화된 신성(神性), 더럽혀진 성스러움을 회복하기 어려운데 지금의 종교는 평화는커녕 종교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오히려 전쟁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천년은 새로운 종교성, 새로운 영성의 시대가 되어야 하며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지성인들이 많은데 정작 교회는 평화의 방주를 전쟁용 군함으로 개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교 없이 평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종교평화 없이 세계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종교간의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이 시급한 때다. 평화의 방주는 많을수록 좋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