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순 민족화해위원회 한정관, 정광웅 신부 등 임원들을 따라 연해주를 다녀왔다. 연해주는 두만강 하구에서부터 바다에 연해 있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이다.
1937년 스탈린의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던 고려인들 중 일부와 그 자손들이 돌아와 재 정착하고 있음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우리의 기업과 단체에서 임차해 영농하는 몇 농장에서 벼를 수거해 가장 기근이 심한 함북 지역에 지원하며 고려인들의 정착에 도움을 주려 함이었다. 몇 년 전 나진 선봉에 갔을 대 러시아 기차가 나진 부두가까지 갈 수 있는 광궤 철로를 보았었다. 여러 사정으로 함북민 돕기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고려인들 정착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벼가 도정되는 대로 그들에게 나눌 수 있도록 조치되었음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들을 보며 많은 상념이 떠오른다. 우리 민족사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자의든 타의든 외국에 이주해 갔는가? 최근 200여년만에 참으로 많은 이민이 이뤄졌다. 어림하여 500만이라 하며, 만주 일본 미국 러시아가 대표적 지역이다.
각 지역의 이민사는 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애환의 아픔을 담고 있을까? 연해주 고려인 이민사는 그 단면을 보여준다. 1800년대에 아직 한,중,소의 정부 공권력이 별로 미치지 못하는 남만주(간도)와 연해주 두만강 건너 버려진 땅을 개척하며, 중,소,일의 세력 다툼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들, 항일 투쟁들…. 러시아 연합 붕괴로 회교권에서의 삶의 어려움, 또다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정착했던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으며 농토는 있지만 형편없이 낡은 병영의 막사에서 추운 겨울을 지낸 그들. 아르춈 시장 안 한 식당에서 만난 백여명 노인네들은 비록 냉방이지만 푸짐한 저녁 식사에 마냥 즐거워하고 옛 민요를 부른다. 70세 이상 된 분들은 더듬지만 우리말을 한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 살며 일한다. 그들을 보며 이민 2, 3세대의 모습을 본다. 조상의 말을 잃은 세대는 민족의 문화를 잊게 된다. 그 나라 그 지역에 일부 동화되지만 외모나 많은 면에서 변두리 인생이 된다. 주류가 아니라 이방인의 삶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러시아엔 인종 편견이 별로 없고 언어가 통일되어 있는 점이다. 또한 남한 사람들에 대한 호감을 지니고 있다. 유의할 점은 고려인(러시아말로 카레이스키) 말고도 만주에서 넘어오는 조선족 사람들, 벌목공들, 외화벌이군으로 오는 북한 근로자들, 사할린에서 온 사람들, 남한의 상사 직원, 선교사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어림하여 모두 10만에 이르지만 그들간에 큰 분쟁은 없단다.
이제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몫은 무엇인가? 남북 화해 기운이 감도는 이즈음에 말이다. 북녘에 투자하고 지원해야 하기에 연해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남북 합쳐서 농업 자원의 바탕이나 총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면 이웃한 연해주의 농림 수산 지하 및 에너지 자원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축복임을 알겠다. 우리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인력, 연해주의 자원이 결합될 때 우리 모두의 축복의 땅이 유엔에서도 인정한 황금의 삼각주가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루에 물고기 한 마리 주는 식이 아니라 물고기 낚는 법과 낚시터까지 마련하는 슬기가 필요하다.
더욱 우리의 기술과 자본, 북의 인력을 환영하는 그들이다. 일본이나 중국엔 1~2년의 경작권을 주지만 우리에겐 50년의 경작권을 준다. 나아가 우리는 민족의 디아스포라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 종교를 잊은 그들(고려인 노인들은 개신교 활동을 이상하게 여긴다)은 다만 정월 대보름에 하늘에 빌 뿐이라는 그들에게 참 하느님을 알게 해야 된다.
개신교 목사님은 30여명이 종교 비자를 지니고 활동하고 있단다. 우리는 참으로 해외 선교에 눈이 멀어 있다. 그 드넓은 연해주 전체에 마이론 신부와 보좌신부 한 분 뿐이다. 그분들은 500여명의 신자가 있는 블라디보스톡 성당과 7개 공소를 방문해 미사를 봉헌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톡 성당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50여명의 노인들에게 급식을 하는 등 다양한 까리따스 활동도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지원을 희망하고 있다. 감사스럽게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진출하기 위해 세 분이 동행했고 작은 아파트를 얻고 말을 익히기 위해 학교에 등록했다고 한다. 이웃 훈춘에는 이미 수녀님들이 파견되어 있다. 또 다른 희망은 우스리스크 고려인 회관에 한글을 배우러 온 고려인 어린이와 러시아 어린이에게 외대 여학생이 자원으로 봉사하고 있었고 (그곳에선 되돌려 받으리라는 옛 성당터도 돌아보았다) KBS 위성 방송을 시청할 수도 있었다.
안중근을 비롯해 독립군들이 활약하던 광활한 지평선의 대지가 우리를 부른다. 남북 화해와 민족 생존을 위한 숨겨진 한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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