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탄다는 말이 있다.
더위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 여름만 되면 맥을 못추는 체질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특별한 약질이 아니더라도 땀을 많이 흘리게 되는 계절엔 누구나 기운이 떨어지고 의욕을 잃게 마련이지만 나는 여름을 좀 유별나게 타는 편이다.
나의 여름타기는 6월부터 시작된다. 6월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달력이 6월달만 가리키면 벌써 시름시름 기운이 없어지고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진다. 스무살때부터 생긴 병이다.
내 나이 한참 꽃다운 시절, 스무살 때 6 25가 터졌다. 대학교 일학년 때였다. 누구나 그맘때면 그러하겠지만 나도 기고만장 했고, 내가 짜고 싶은 찬란한 인생의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늬를 한뼘도 짜기 전에 싹뚝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피붙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보았고 고향을 잃었다.
제명에 못죽은 피붙이들의 기일(忌日)이 여름에 몰려있는 것도 6월을 마치 죽음의 문처럼 불길하게 여길 수 밖에 없는 까닭일 것이다.
내 고향은 개성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쯤 개풍군의 벽촌이다. 강화도 북단에 가면 고향마을이 마치 강남에서 강북 바라보듯이 지척으로 바라 보인다. 망원경 없이도 북녘 산천은 물론 그쪽 사람들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이나 손에 잡힐 듯 보인다.
6 25전까지는 자유롭게 오갈수 있는 38선이남의 땅이었다가 휴전협정 후 휴전선 이북의 땅이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일년에 몇번 거기 가서 고향땅을 하염 없이 바라보는 것을 무슨 경건한 의식처럼 행하시곤 하셨다.
세상에, 독한 민족도 다 있지.
그게 고향땅을 바라볼 때마다 뇌까리던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그건 북에 대한 원망도 남에 대한 항의도 아닌 어떻게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철통같은 적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나하는 분단체제에 대한 일종의 공포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아버지 곁에 눕지 못하셨지만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와진 넋은 비로소 아버지 곁에 도달하셨으리라.
어머니가 생전에 풀지 못한 한을 나는 생전에 풀수 있을 것 같다.
우선 6월이 좋아지려고 한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날짜가 6월로 잡히고 부터이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불구대천의 적대 관계를 오십년씩이나 겪어온 우리로서는 도무지 꿈 같은 얘기다. 너무도 바라던 것이 이루워지려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우리 마음 속에서는 불안과 조바심이 싹트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다 되갈 무렵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된 불길한 선례까지 있고 보면 이 일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되는 일인것만 같아서 혹시 그 사이에 마(魔)가 낄까봐 조마조마하게 된다.
남북이 갈린 것은 해방 후 외세에 의해 그어진 38선에서 비롯됐지만 반공이나 멸공을 국시로 삼을 수 밖에 없는 불구대천의 원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6 25라는 동족 상잔이 있고 부터였다.
6 25로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상처받지않은 가정은 한 집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건 끔찍한 전쟁이었다. 그걸 겪은 사람들은 누구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면 가슴에 비수라도 품게 되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수가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내가 통과해온 그 시절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때를 인간으로서 어찌 믿고 싶을 것인가. 그 오랜 원한관계에 화해와 용서의 기운이 비치고 있다.
6월에 비롯된 원한을 6월에 풀려는 시기적인 일치를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더군다나 정상화담을 바로 앞둔 주일날 미사에 갔다가 그날이 성령강림 대축일인걸 알고 6월이 더욱 좋아졌다.
아아 드디어 성령이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구나하는 확신 같은 게 생겼다. 성령강림 대축일이 있는 6월달에 정상화담이 열린 것이야말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주소서. 일할 때 휴식을, 무더울 때 바람을, 슬플 때 위로를. 지복의 빛이시어, 저희 맘 깊은 곳을 가득히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면 저희 삶 그 모든 것 이로울 게 없으리. 허물은 씻어주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 고치소서. 굳은 맘 풀어주고 찬 마음 데우시고 바른 길 이끄소서.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에게 칠은을 베푸소서. 공덕을 쌓게 하고 구원의 문을 넘어 영복을 얻게 하소서
그날 미사에서 교우들과 함께 정성껏 바친 이 기도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서도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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