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겨울 어느 추운날, 서울 명동성당 언덕의 성모상 앞에 서 있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찾은 성당의 주변은 온통 찬바람 뿐이었다. 가슴 속은 더욱 추웠다. 마음은 갈래갈래 흩어졌다.
부끄러움 속에 두손을 맞잡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시면 다시는 냉담하지 않겠습니다』는 참으로 치기어린 신앙고백이었다.
칠순을 넘긴 어머니가 몇개월째 병원 중환자실에서 신음 하던 때였다. 담석증 수술후 합병증이 악화된 상태였다. 날마다 의사에게 호소해도, 대기실에서 밤을 세워도 속수무책이었다. 항상 손에 간직하던 묵주가 스르르 빠져나가도 어머니는 의식하지 못했다.
『살아야한다』고 말하면 상하로 끄덕이던 고개짓도 좌우로 바뀌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수술 동의서에 선뜻 도장을 찍은,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결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아들의 손을 잡은채 두려움 없이 웃으며 수술실로 향하던 어머니는 퉁퉁 부은채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네곳 침대난간에 묶인 사지와 얼굴을 덮은 산소마스크, 그리고 주사바늘 자국으로 성한곳 하나 없는 차디찬 손과 발.생명이 그토록 바람 앞의 촛불같은 것일까. 아무리 바람을 가리려해봐도 꺼질듯 나붓기는 어머니의 의식이 나를 성모상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장례를 준비하라」는 집안 어른들과 주변의 얘기에도 불구, 그해 여름 일어선 어머니의 회생. 그 은혜가 단순한 의학의 힘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도 불편하고 통원치료를 받지만 일요일이면 그런 어머니와 함께 드리는 미사가 눈물겹고 안온하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에 항상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몇년전의 그 치기같은 어리석음으로 일주일 한번의 미사를 비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가끔 짜증스러움을 느끼는 자신과 허허로운 자문자답을 나누기도 한다. 나이 50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 이 모양이다. 얼마전 세계언론에 보도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신앙고백」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지난 8월 10일 그는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성직자대회를 통해 자신의 섹스 스캔들에 대해 용서를 비는 고해성사를 치렀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온몸을 휩싸는 감사의 느낌을 갖습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결코 온전히 진지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항상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 용서를 구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미모의 백악관 인턴사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날 4500명의 목사들 앞에서 『엄청난 실수에도 국민이 보여준 관용과 변함없는 지지에 머리 숙여 감사한다』며 고백을 마쳤다. 목사들의 기립박수가 그 뒤를 이었다.
사실 클린턴의 섹스스캔들은 하루이틀전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 92년 대선후보 때부터 붙어다닌 꼬리표였다. 어쨌든 그는 르윈스키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로 하원의 탄핵(98년 12월)을 받았다.
그리고 상원의 탄핵표결까지 간 것은 두번째이자 131년만에 처음이었다. 세계 유일최강국 과시와 사상 최장기 호황지속 등 그의 재임기간동안 이룩한 빛나는 업적도 불륜의 그늘에 가려졌다. 결국 99년 2월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며 그는 위기를 넘겼고 고통스런 사죄의 종교의식을 치르기에 이른 것이다.
클린턴의 이같은 행위를 두고 미국언론과 정계에서는 고도의 민주당 대선전략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소위 '르윈스키 카드' 라는 분석이다. 고어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클린턴이 또한번 자기모욕을 감수하는 종교의식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치의 세계에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클린턴의 르윈스키 사건과 관련한 신앙고백을 술수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웃음꺼리가 됐던 미국대통령 클린턴.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실추와 체면 손상보다는 인간적으로 가족과 주변 그리고 미국민들에게 끼친 배신감과 불신감이라고 믿고싶기 때문이다. 헛된 욕망과 작은 이해 앞에 인간은 얼마나 약한 것인가.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잠깐에 불과한 성체성사 때마다 항상 뼈저리게 느끼는 아픔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 머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말씀 앞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을 해야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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