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향토예비군 시절에 동네 향군 중대장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북한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중대장은 그저 우리의 적이라고만 대답했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배격해야할 사상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집단이기 때문에 우리의 적군이고 따라서 마땅히 배격해야 하며 적군이 밀고 들어오면 쳐부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 이다. 참으로 단순한 논리이며 맞는 말이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막고 물리쳐야지….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공산 주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무엇이며 왜 공산주의가 지구상에 등장했는지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그 발전과정, 그들의 전술, 프롤레타리아 혁명, 과도기적 공산당의 역할 등에 대해서 완전 무지였다. 적국 방어임무의 간부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셈이었다. 아마도 그 중대장의 『쳐부수자, 공산당』의 단순 구호가 극우 반북세력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한 마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맹목적 논리와 정서가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를 지배하였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작금의 놀랍도록 변하고 있는 남북관계와 그 정책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극우 보수적 시각을 갖도록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말한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며 북한은 변하지 않았 다고. 그렇다. 2,3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현재의 남북관계가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북한은 아직까지는 여전히 우리의 주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 저것 귀찮게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쳐부수자 공산당』식의 적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껴안고 보듬어야할 적이다. 오랫동안 비뚤어진 길을 가다가 패가망신한 형제인 셈이다. 그 형제를 껴안으려 할 때 여전히 거칠게 할퀴고 발버둥칠지도 모른다. 올림픽에 남북이 함께 손을 잡고 입장하고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 응원을 했을 지라도,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한의 언론인들을 만나 호탕하게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언제 또다시 생트집을 잡고 늘어질 지 모른다. 그래도 한 수 위에서 인내로 기다리며 항구적으로 햇볕을 쏘여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군사력도 아니며 크리스찬적 박애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녕 무신론적 공산주의(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기초한)는 배격되어야한다. 이미 가톨릭 교회는 공산주의가 출현할 때부터 여러 차례 교황의 칙서를 통해 그 사상의 허구성을 지적하였고 경고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시 했던 사회주의 지상낙원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고 무산계층의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계급 투쟁의 과도기적 임무를 수행할 공산당원들만 특수계급으로 자리잡는 아이러니한 결과만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여하튼 북한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미 변화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다. 남북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국제적으로 단단한 껍질 속에서 살며시 머리를 내밀다가는 후다닥 기어 들어가고 또 기어 나오고 하는 등 종잡을 수 없이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변화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명확한 표징이 아닐까?
그들이 50년 동안이나 원수라고 이를 갈던 미국과 손을 잡으려고 그 얼마나 필사적이었나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너무나 크게 실패한 사회주의 노선과 그 경제, 너무나 절대적인 권력체제의 유지, 너무나 서툰 세계화로의 발맞춤, 너무나 철저히 세뇌되어버린 북한주민들 등 때문에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는 것 같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역시 변해야 한다. 물론 신중해야하고 우리의 입장, 주체성이 확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수십 년간 지녀왔던 맹목적 반공주의와 냉전적 반북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정서는 버려야 한다. 더구나 보수 우익세력과 극단적 반북세력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북한 민주화론 등은 남북관계의 냉전적 대결을 더욱 격화시킬 것 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리는 흡수통일론을 전제할 뿐 아니라 북한이 줄기차게 지녀왔던 남조선 혁명론(적화 통일론)이 우리 에게 주는 의미와 같은 비중으로 북에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한겨레 opinion 9909/7).
공산주의의 허구성은 드러났고 그 종주국과 추종국가들도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출현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자유 경제주의 하에서 참다운 나눔과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 지지 않은 상황에서가 아니었던가? 지금이야말로 민족공동체의 차원에서 진정한 나눔의 실천과 대화가 필요한 때라 본다. 진정한 나눔과 분배가 없는 곳에는 언제든 또 어느 형태로든 그 대항 논리와 세력이 생기기 마련 임을 명심하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