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초현양. 사격선수인 초현양의 얼굴을 TV에서 보기라도 하면 코끝부터 시큰하다. 지난 9월 16일 시드니 올림픽 첫날 공기소총 개인전 에서 은메달을 딴 여고 3년생 소녀다. 마지막 10발째의 방아쇠를 당긴뒤 사선을 걸어나오며 아쉬움에 눈물을 흘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초현양. 그러던 그녀가 조금 후 시상대에서 티없이 환한 웃음을 웃으며 금메달리스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고 관중들에게는 손을 흔들었다. 0.2점차로 역전패한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참 표현하기 힘든 어른스럽고 당찬 태도였다. 그러나 정작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것은 그 소녀의 장한 은메달이 아니라 은메달 뒤안의 숨겨진 삶 때문이었다. 『은메달을 딴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요.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동안 고생한 생각도 나고 금메달을 못따 아쉽기도 하고 은메달이라도 따내 기쁘 기도 하고』
초현양은 지난해 5월 아버지를 여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지난 71년 수류탄공격을 받아 오른쪽 발목을 잘라냈고 그후 나머지 다리마저 전상후유증으로 잃었다. 매달 50여만원의 유공자 연금중 대출원리금 등 이것저것 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수입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니에게는 효녀였고 아버지의 발 역할을 했다. 두다리가 없는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다니는 조숙한 소녀였다. 대전시 유성구 외삼동 소녀의 집 거실 에는 이미 세상을 뜬 아버지가 생전에 걸어놓은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가 크게 걸려있다고 한다.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승리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게하소서…'」.
이같은 소녀의 삶이 알려지면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만큼 TV카메라가 소녀를 비추었지만 차분하고 구김살 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심지어 초현양의 팬클럽이 생길 정도가 돼 오히려 매스컴의 지나친 관심이 우려의 대상일 정도가 됐다. 어디 초현양 뿐이겠는가. 9월 28일 한국태권도의 첫 금메달을 딴 정재은양(20. 한국체대)도 가시밭길 속에서 금메달을 일군 경우다. 그녀의 가족은 18만원짜리 지하월세방에서 생활해왔고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해 어렵게 정선수를 키워온 것으로 보도됐다. 그녀의 아버지는 휴일도 없이 공사판일로 돈을 모아 9월 27일 시드니로 출발, 딸의 경기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전날 경기의 부상으로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상황에서 레슬링결승을 통해 투혼을 발휘했던 은메달의 김인섭 선수, 가정주부로 6년만에 다시 활을 잡은 양궁의 김수녕 등 악조건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들보다 아픈 이야기들은 더 많을 것이다. 메달리스트들에 못지않은 역경을 이기고도 메달권에서 밀린 선수들. 그리고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부터 좌절해버린 수많은 선수들의 노고역시 우리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의 열광은 항상 이같은 인간드라마를 연출해낸다.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분야가 스포츠이기 때문일까.
지난 10월 1일 폐막된 시드니올림픽을 다시 뒤돌아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사회 전반의 「1등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스포츠에서 극복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 이다. 그리고 초현양의 「자랑스런 은메달」등 새천년 첫 올림픽의 감동드라마는 그 희망중의 하나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승리의 기쁨 못지 않게 아름다운 패배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에 만연돼 있는 적자생존의 정글문화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맹목성의 결과중시에 익숙해져 있다. 그 과정이야 어쨌든 일단 이기고보는게 중요하다. 어떻게 이기고 지느냐 하는 문제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초현양의 은메달 이야기가 아직도 선명한 감동으로 남는 것도 이같은 사회에 대한 경종 때문이다. 금메달에 대한 아쉬움보다 은메달의 뒤에 가려진 한 소녀의 진한 삶이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더 중요한 메달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은메달이 어른들의 상업주의로 이용되지 않을까하는 우려 들이 나오고 있다. 광고업계는 초현양을 모델로 등장시킬 예정이고 일부 방송은 시트콤에 출연시킨다는 얘기도 있다. 그 결과를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은메달이 금빛 보다는 은빛으로 남아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덕목이자 의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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