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전교활동
전교사들은 제주도민의 특유한 민속신앙과 제주도의 사회적 풍속을 이해하고 이에 토대를 둔 전 교활동을 펴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신앙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전교활동을 폄으로써 제주도민을 자극하게 되어 의혹과 반발을 받게 되었다. 한편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벌어지는 교인과 민인 간의 다툼에 전교 성직자들이 교인 보호 차원에서 간섭하고 나섰으며, 때로는 지방관을 불신한 나머지 법 집행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사회적 물의를 자아내는 일도 생겨났다.
한편 소수이기는 하나 자탁교인이라는 사이비 교인의 행패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로는 도를 넘어선 교회의 대책이 교폐(敎弊)로 지탄받고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되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제주사회와의 진지한 문화적대화를 소홀히 한 채 일방적으로 강행된 전교활동에서 생겨나게 된 허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중앙의 감독권이 직접 미치기 어려운 남해의 고도였기에 제주도에서는 관료들의 월권적 행세와 가혹한 경제적 수탈이 예부터 자주 문제되어 왔었다. 거센 기질의 제주민들은 결속하여 집단적으로 관에 저항하는 민란을 자주 일으킨 전통을 갖고 있었다. 신축교안 (辛丑敎案)에 앞선 20년 간에도 세차례에 걸쳐 민란(民亂)을 겪었다.(1890, 1896, 1898년의 민란들) 이런 전통을 가진 제주도에 신축교안 발발 반년 전에 외지관료인 강봉헌(姜鳳憲)이 세수 수납의 책임자인 봉세관(捧稅官)으로 제주에 도임하여 새로운 명목의 각종 세를 강징하게 되었다. 이 때 강봉헌의 수족으로 세수의 실무를 담당했던 말음(舍音)으로 일부 천주교도가 고용되었었다.
봉세관의 강력한 세수작업은 종래 징세업무를 담당하며 경제적 실리를 취하던 지방관료와 강세에 불평을 품게 된 제주도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봉세관의 세납업무와의 관련에서 벌어지던 작폐인 이른바 세폐(稅弊)를 제주민인들은 교회의 비호와 협조하에 저질러지는 폐단으로 생각하고 교회와 봉세관을 싸잡아 비난하고 나섰다.
사설 상무사
제주도 포교 초기에 교.민 간에 생기게 된 의혹과 반감이 점차 불신과 갈등의 단계를 넘어 대결과 투쟁으로 열전화되는 데에 깊은 관련을 가진 제주도민의 조직은 대정군(大靜郡) 군수 채구석이 조직한 상무사(商務社) 였다. 한편 교폐(敎弊)에 격앙한 제주민인들을 자극하고 민인측에 무기를 공급해 준 일본인 제주해역 밀어업자의 행위가 주목된다.
대정군 군수 채구석이 중심되어 조직한 상무사는 상업과 국제무역이나 그 밖의 상행위를 관장하기 위하여 1899년 중앙정부가 설립한 상무사와는 달랐다. 그것은 채구석이 앞장 서서 지방유림 및 향촌민들과 합작하여 조직한 사설(私說)의 상무사였다. 이 상무사는 제주도민의 지역적 권익의 옹호와 향촌사회 옹위를 목적으로 하는 지방조직이었다. 천주교인의 가입이 배제되었고 본토 출신의 봉세관이나 관료에 대해 반대운동을 펴는 등 배타성이 강한 향촌조직이었다. 책임자는 대정군수 채구석 자신이었고, 부책임자는 지방유림 오대현(吳大鉉)이었으며 실무 집사는 천인출신의 청년장부 이재수(李在守)였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중앙정계의 거물 김윤식(金允植)의 수기에 의하면 채구석이 자신을 방문하여 교폐를 막기 위해 상무사를 조직했노라고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상무사가 천주교 배격의 배후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續陰晴史 光武 5年 辛丑 4月)
실제 5월 6일 대정에서 상무사가 중심되어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민군(民軍)을 조직하였을 때 동진 지휘자(東陣狀頭)가 상무사 부책임자인 오대현이었고, 서진장두(西陣狀頭)가 상무사 집사이던 이재수였음을 보아도 상무사가 민군 조직에 깊숙히 관계하였으며, 제주읍성 공격전을 주도한 배후 조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불법 밀어업자
교.민 간의 다툼으로 격앙된 민인에게 군사적 힘을 실어주게 된 것은 제주어장에서 밀어활동을 펴오던 일본 불법 밀어업자였다. 일본의 불법적인 밀어업자가 민군측에 접근하여 제주도에 혼란이 벌어지도록 공작을 편 데에는 그들 나름의 간계가 숨어 있었다. 당시 제주통어영파운동 (濟州通漁永罷運動 일본 어업자들이 제주해역에서의 어업활동을 영구히 못하게 하자는 운동)을 펴고 있던 제주도민의 일본 밀어업자 제주해역 침범 반대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제주도민의 강한 배외운동의 표적을 교회로 돌림으로써 경제적 야욕을 계속 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군 진영을 드나들며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민란을 부추기며 전란사태가 벌어지도록 유도하기 위해 무기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민군과 일본 밀어업자 황목유십랑(荒木留十郎)의 비밀스런 관계는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의 실권을 장악한 덕천정권(德川政權)의 통어엄금(通漁嚴禁) 정책으로 한국 해역에서의 일본인의 어채활용은 오랫동안 문제되지 않았었다. 그 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에 맺어진 좥한일통상장정좦에 의해 양국 약정해역에서 어업활동이 허용되면서 일본 어업자들의 남해 출어가 활발해진다. 일본 어채부들이 제주해녀 잠수어장에 나타나 함부로 어업활동을 펴게 되어 해녀들의 제주잠수어업에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그 후 잠수기 어업자 마저 제주해역에 나타나 반해적적 남획을 일삼게 되어 제주어장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생업수단에 위협을 받게 된 제주도민의 항의를 받은 우리정부는 제주도 어채를 당분간 금지하는 제주통어잠금(濟州通漁暫禁)교섭을 벌여 1889년에 한일어업장정(韓日漁業章程)을 맺을 때 일본인의 제주 출어를 1년 후로 미룰 수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 밀어업자들이 난동을 일으켜 제주어민 양종신(梁宗信)을 살해하는 폭행을 저질렀다.
제주도민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본 밀어업자들의 기세가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제주도민은 제주출어영파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사태 조사차 중앙에서 제주도에 파견된 순심사(巡審使)를 제주에서 축출하는 소란을 일으키니 우리 정부는 그 뜻을 받아들여 변무사(辨務使)를 일본에 파견하여 제주도 통어를 금지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신축교안 발생 당시는 일본 밀어업자의 제주 근해 밀어행위가 성행하여 해녀의 잠수 채취가 중심인 제주어업은 황폐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게된 제주도민의 일본인에 대한 원성이 높은 때였다. 이러한 험악한 대일관계에 놓여진 제주도에서 교민간에 쟁투가 벌어지고 신축교안(辛丑敎案)의 대참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공작에 암약한 자는 당시 비앙도에 자리잡고 밀어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황천유십랑(荒川留十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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