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남북 이산가족의 소식이 알려지며 재회를 학수 고대하는 기막힌 사연들을 보며 제3자인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 불현듯 오래 전에 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70년대 말일게다. 서독에서 돌아와 서울 가톨릭사회 복지회를 시작하던 때였다. 주교관 식당에서 내 성격 탓에 입빠른 소리를 했다. 월남한 신자들의 이야기였다. 북에서 혼인성사를 받은 형제가 홀로 월남해 결국 재혼한 경우, 열심한 신자인 그는 미사는 참여해야 하지만 영성체를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주교님들이 고통 당하는 양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태리나 블란서, 독일이 반동강이 나서 수십년 생사도 모르고 만나지도 못한다면 교회법을 바꾸기라도 해서 해결이 되었을 겁니다』. 그랬더니 어느 국장 신부가 말하기를 『어느날 갑자기 북녘의 부인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만나게 된다면 어쩔껍니까?』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면 구약의 모세나 다윗왕처럼 살면 되잖나. 대 성인으로 추앙만 받고 있잖은가』.
이제 그런 형제들은 주교님들의 사목적 배려였던지 부인도 모두 세례를 박도 성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반세기만에 몇몇 사람들은 그 옛날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당국자가 부부나 부모자식은 원하는 곳에 함께 살 수 있게 되리라고 한 말을 쉽사리 믿지는 않지만 그렇게 될수도 있겠고, 더욱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제 더이상 어느 정권이나 주의, 사상도 부부와 부모 자녀 등 가족이 함께 살겠다는 것을 막을 명분도 권리도 없다. 이것은 천부적인 자연적 인권이다.
앞으로 더이상 그들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들어도 합당치 않다. 비전향 장기수가 고향의 가족 품에 돌아가듯 국군 포로나 납북어부, 남편이나 아내나 친자식을 만나거나 함께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북으로든 남으로든 제3국이든 가게하고, 오게해야 한다
어느정도 혼란은 감수해야 한다. 별의별 남북인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내세우고 노래하는데 그 통일의 첫걸음은 생이별한 부부나 부모자녀 형제자매간의 만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 안에 50년이나 백성과 가족들을 이렇게까지 떼어놓고 원수지게하고 만나지 못하게 하고, 소식조차 알지 못하게 해온 민족이 우리말고 또 누가 있는가. 외래 사상 때문이었는가. 강대국에 눌려서 그랬단 말인가. 이 민족의 비인간성 때문이었는가.
또한 「해방 해방」외치는데 무슨 해방인가. 바오로는 육신으로부터 해방을, 혹자는 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북녘의 많은 백성들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해방과 자유는 고귀한 땀과 피의 희생이 있어야 얻고 지켜지는 것이다.
우선 남북의 어느 정권도 백성의 소리에 겸허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얕은 꾀로 현실을 호도해서 정권 유지나 개인 집단의 이익만을 생각해선 안된다. 우선 만나게 하라. 소식을 전하게 하라. 서로 보게하라. 서로 주고받게 하라. 사고 팔게 하라. 생각을 밝히게 하라. 지식을, 믿음을 전하게 하라. 서로 부여잡고 울고 웃게 하라.
동서독에서도 은퇴한 동독의 부모는 서독의 자녀와 결합할 수 있었다. 통신과 물자의 상통도 먼저 이루어졌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백성을, 우리 자신 모두를 옥죄왔다. 철조망보다 더 지독한 사상적 담장으로 남북의 백성을 얼어붙게 했다.
많은 이들의 걱정은 북은 꿈쩍도 않는데 우리만 헤프게 푸는게 아니냐. 굶주리며 떵떵거리는 그들에게 주면서 (바치면서?) 뺨맞고 있지 않느냐.
한편 가진 자가, 힘있는 자가 먼저 베풀어야 한다고 우긴다. 여기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의 힘보다 정신적 신념의 힘이 더 강함을 종교적 순교자들에게서 보게된다.
북의 주체사상은 바로 종교가 아닌가? 우리의 어설픈 신념, 겉만 번지르르한 경제로 어찌 감당할 것인가. 바로 종교가 아닌가? 우리의 어설픈 신념, 겉만 번지르르한 경제로 어찌 감당할 것인가. 그래도 물이 바위를 뚫는다지 않는가.
나는 오래전에 노동집약적 산업은 북으로 보라. 정치보다 기업가 장사꾼에게 남북문제를 맡기고 말했다. 기업이야말로 세계 시장 자본주의(사회주의)의 핵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가들의 정략적 접근에, 매스컴의 선전조작이 아니라 작고 낮은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야 된다는 것이다. 작은 틈새 구멍으로 제방이 무너지듯 백성 한 사람, 한사람이 나서야 한다.
이제 남북의 정치가들은 한발 물러서서 백성을 때려잡는 몽둥이를 없애라. 인권, 환경 등 큰 틀만 만들고 백성은 제멋대로 욕심사나운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이웃과 민족의에 이되는 자율적 활동으로 우리 모두를 화합케 해야한다.
오늘의 모세와 다윗 : 북녘의 부인과 자녀들을 맞이하는 할아버지들이 있기를 빌어 본다. 우리 모두 작금의 집단 이기주의적 투쟁에서 참으로 모든 것을 나눌, 희생할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하겠다.
2천년 대희년의 광복절, 성모승천대축일이 다가온다. 남북의 모든 백성은 이제 모든 정치 사회적 질곡에서 새롭게 해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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